[취재일기] 정유사 탓만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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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정 경제부 기자

국제 유가의 급등을 틈타 국내 정유사와 대리점.주유소들이 폭리를 취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소비자의 부담은 커지는데 업계가 자기 배만 불리려고 하는 데다 담합성 가격 인상의 의혹도 짙다는 것이다.

지난 16일 재정경제부는 확대 간부회의 직후 "정유사들이 영업 마진을 늘린 것에 대한 조사 여부를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공정위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날 4개 정유업체 본사에 조사관을 급파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다. 유가가 계속 치솟으면서 세금 인하 압력이 거세지자 정부가 책임을 기업에 전가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다. 휘발유 가격의 66%(ℓ당 862원)는 세금이다. 지난주 재경부 고위 관계자는 "유류세를 ℓ당 15원 인하해봤자 소비자 가격이 내려간다는 보장은 없으면서 세수만 연간 6000억원 줄어든다"며 세금 인하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정유사와 주유소들이 엄청난 영업 마진을 보고 있다"며 화살을 업계로 돌렸다.

공정위의 조사는 이 같은 발언이 나온 지 불과 사흘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업계는 "정부가 또 정유사 길들이기에 나섰다"며 불만을 털어놨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에서는 고임금을 받는 정유사 임직원들의 월급을 깎아서라도 가격 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업계가 과도한 이익을 챙겼는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을 뿐더러 정부나 시민단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다. 업계가 담합해 기름값을 올렸다면 정부가 조사하고 제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윤을 많이 남겼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라 소비자와 주주의 몫이다. 석유공사 관계자는 "국제 유가 상승분을 얼마나 가격에 반영하고, 마진을 얼마로 잡을지는 전적으로 기업이 판단할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는 시장의 자율에 맡기겠다며 1997년 석유제품 가격을 자유화했다. 그런데도 만일 기업에 압력을 가해 가격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면 정부 스스로 원칙을 무너뜨리는 처사다. 사정이 어렵다고 손쉬운 해법을 찾는다면 정부 스스로 신뢰성을 떨어뜨리게 된다.

장세정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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