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 임창순 선생님을 추모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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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청명 (靑溟) 선생님! 이번에는 입원하신 줄을 미처 몰라 가 뵙지 못한 채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게 됐으니 안타깝고 허망할 뿐입니다.

선생님을 처음 뵈온 것은 6.25 전쟁이 막 끝난 1953년 하반기였다고 기억합니다만, 우리가 아는 선생님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이셨습니다.

한학 (漢學) 만을 수학하신 선생님은 일제시대에는 갖은 고생을 다하셨고, 해방 후에야 고등학교 교원을 거쳐 대학교수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4.19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가 5.16 후에는 그 자리도 잃고 말았습니다.

기록사진에서 흔히 보는 교수 데모대의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고 한 그 역사적 플래카드는 선생님이 쓰신 것이지요. 대학을 쫓겨나신 후 군사독재정권 아래서는 혁신운동.통일운동에 몸 바치셨다가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방청 간 재판정에서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며 웃으시던 학 (鶴) 같은 그 모습을 마치 어제 뵈온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 쫓겨나신 후의 선생님은 하실 일이 더 많았습니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양성한 인재들은 전국의 대학교단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으며, 만년에 전 재산으로 만드신 청명문화재단은 '통일시론' 발간 등 여러 사업에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유명을 달리했다 해도 이 땅의 진보주의자.평화주의자 임창순 (任昌淳) 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선생님의 높은 뜻을 이어서 펼 책임이 슬픔보다 크고 무겁습니다.

엎드려 명복을 빕니다.

편히 잠드소서.

강만길 역사학자. 전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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