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8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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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제8장 도둑

승희는 형식에게 얼른 지폐 몇 장을 쥐어주며 눈짓을 하였다. 태호의 느닷없는 넋두리에 덩달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던 형식은 용수철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문 밖으로 나선 형식은 그러나 곧장 가게로 달려가진 않았다. 길바닥 위에서 브레이크댄스를 한 번 추었다. 두 발을 가볍게 치켜올려 스텝을 밟다 말고 눈 깜짝하는 사이에 정수리를 땅에 대고 거꾸로 선 뒤 휘그르 돌았다.

불 켜진 화개장터의 가게와 식당들의 실루엣이 두바퀴 세바퀴 거꾸로 돌아가다가 그의 이마 앞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눈물이 나려 할 땐 숨어서 추었던 그 나름대로의 추스름이었다.

가게로 달려간 형식은 세 병의 소주를 샀다. 그리고 가게주인이 바라보는 앞에서 입으로 한 병의 병마개를 뜯어 입술에 얹은 채로 팔매질을 하였다.

병뚜껑이 가게 앞마당 저만큼 나가 떨어져 호들갑스럽게 뒹굴었다. 형식은 입을 병주둥이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포르노 테이프를 같이 보았던 주문진의 또래들 얼굴이 떠올랐다. 반쯤 남은 소주병은 뒷주머니에 꽂고 두 병은 겨드랑이에 끼고 방으로 돌아왔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구도는 형식이가 나갈 때 그대로였다. 승희가 식은 참게탕 냄비를 야외용 난로에 올리고 불을 댕기고 있었다. 철규는 잽싸게 병뚜껑을 따고 형식이 그랬던 것처럼 병째 들어 몇 모금 들이켰다.

"나도 생각이 있어. " "오직 잇속만 좇아 다녀야 한다는 그 생각 말입니까?" "살다보면 때때로 심각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어투가 그렇게 도발적이어야해?" "눈물을 흘려도 가슴 속이 후련하지 않네요?" 말문이 막혔던 철규가 흘끗 형식을 일별했다.

"너 꽁무니에 찔러넣은 소주병 꺼내. 그건 빈둥거리는 건달들이나 하는 짓이야. 장돌뱅이가 건달인 줄 알았다간 큰 낭패당해. 세금은 없지만, 엄연한 직업인이야. 너 그거 알어?" 형식이 냉큼 소주병을 꺼내 놓으며 후딱 자세를 고쳐 꿇어 앉았다.

"부산 자성대에 살고 있다는 비둘기 얘기 들어들 봤어? 나도 한 번도 가보진 못했지만, 자성대란 곳은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하는 양곡부두가 몰려 있는 곳이래. 그 때문에 그 부두의 건물 옥상이며 전선줄이며 해안도로는 이만마리가 넘는 비둘기 부대들의 점령지가 되었다는 거야. 서울에서 부산시내로 진입하다 보면, 자성대에서 출발한 곡물트럭들이 시내 도로로 들어서고 있는 걸 어렵잖게 목격할 수 있어.

그 트럭 적재함에 비둘기들이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는 것도 당연히 볼 수 있어.그래서 자성대에 살고 있는 이 비둘기 부대들이 하는 일이라곤 코 앞에 있는 야적장.곡물수송선과 부두 선착장에 떨어진 곡식을 쪼아 포식하고 근처 건물 옥상에서 낮잠을 즐기는 것뿐이래. 인근에 있는 용두산 비둘기들이 멋모르고 범접했다간 자성대 비둘기들의 융단폭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어 쫓겨난다는 거야.

비둘기는 원래 텃세가 드세기로 유명한 새지. 수효가 많기 때문에 용두산 비둘기들도 일같잖게 퇴치하겠다, 부근에 먹을 것도 풍족하다보니 벌레를 잡으려고 날아다닐 필요도 없고, 쓰레기통을 뒤질 까닭도 없게 되겠지. 그래서 부산에서 살찌는 것은 자성대 비둘기뿐이란 말도 있어. 그런데 바로 그것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거야.

먹을 것을 찾아 멀리 날아다닐 필요도 없고, 경쟁상대도 없고, 하루 종일 포식하고 낮잠만 자는 생활이 연속되는 것은 좋았는데, 그런 생활에 젖어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야금야금 날짐승 본래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거지. 날아야 한다는 욕구는 희미한 옛 추억에 불과한 거지.

바로 그것 때문에 자성대 비둘기들 중에는 날지 못하는 비둘기들의 수효가 빠르게 늘어난다는 거야. 그래서 부두를 드나드는 트럭에 치여 숨지는 비둘기들이 부지기수란 현실을 어떻게 생각해? 그래도 그 날짐승들은 비둘기가 분명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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