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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더 어려운 이웃돕는 노숙자들의 온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지난 27일 오전 9시. 서울성북구보문동에서 홀로 사는 金월금 (75) 할머니는 뜻밖의 '손님' 들을 맞고 주름진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손님들은 이웃 노숙자 쉼터에 사는 실직 노숙자들. 이들이 할머니를 찾은 건 쓰러질 듯 낡은 5평짜리 집을 '봄단장' 해주기 위해서였다.

간단히 방문 이유를 설명한 뒤 이들은 가방에서 장비들을 꺼내들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직 전 도배기술을 익혀놨던 宋모씨는 정성스레 새 벽지에 풀칠을 하고 까치발을 해가며 벽에 발랐다.

전기수선공이었던 李모씨는 전기 수선을 도맡았다.

안팎으로 물청소를 하고 장판도 새로 까는 등 집단장하기를 한나절. 金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도우려 하면 이들은 너털웃음으로 등을 떼밀고 집밖에서 쉬게 했다.

"이제껏 도움만 받고 지내왔잖아요. 이젠 공공근로와 같은 일거리도 생겼고 잠잘 곳도 마련됐으니 도움만 받고 살 순 없지요. " 쉼터 '아침을 여는 집' 에 사는 19명의 노숙자들이 4~5명씩 돌아가며 이웃의 독거 (獨居) 노인을 찾아가 돕는 자원봉사를 시작한 것은 이달 초. 자치회에서 스스로 선택한 '주말 보내기' 다.

"또 하나 좋은 일은 공공근로로 번 돈을 주말마다 술마시고 도박하며 탕진하는 일이 사라졌다는 거죠. 큰 돈은 아니지만 이젠 모두들 공공근로 임금의 절반은 꼭 저축하고 있습니다. "

자신들처럼 외로운 처지의 노인을 도우며 실직 후 처음으로 '뿌듯한' 주말을 보낸 노숙자들. 이들이 오랜만에 지어보인 미소는 아름다웠다.

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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