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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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1) 일본인 사로잡다

앞에서 말한대로 78년에 만든 '족보 (族譜)' 는 월평초등학교 시절 창씨개명한 조선인 선생이 모티브가 됐다.

그때의 울분을 나는 실로 40년이 지난뒤 영화로 풀어냈다.

'족보' 는 일본의 유명 추리작가 가지야마 게이치 (梶山季之) 원작이다.

그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수년전 홍콩에서 객사했다.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관리여서 그는 중학시절을 경성 (서울)에서 보냈다.

'족보' 는 이런 그의 성장배경에서 비롯됐다.

이 작품에는 설진영 (주선태) 이라는 한 조선인이 등장한다.

경기도 수원의 갑부인 그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창씨개명을 거부한다는 내용이다.

그때까지만해도 이런 걸 다룬 소설은 내 기억엔 없었다.

나는 이 작품속에 투영된 작가의 시선이 좋았다.

잘못된 식민지 정책에 대한 일본인의 비판적 눈길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여기에다 소학교시절의 경험도 있고해서 대뜸 영화를 만들 생각을 굳혔다.

이 작품은 영화 이전에 장민호 주연의 TV드라마로 만들어져 꽤 인기도 끌었지만, 이게 영화를 만든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원작과 다른 느낌을 표현하려고 부단히 고민했다.

원작에는 일본인 주인공 다니 (하명중)가 설 (薛) 씨 집안을 찾아가는 대목이 나온다.

벼를 베어낸 썰렁한 겨울 들판을 을씨년스럽게 묘사하면서 작가는 망해가는 조선 민족의 비애를 여기에 대비했다.

그러나 나는 활기찬 봄 풍경부터 영화를 시작하면서 저항의 물결이 팽배한 조선인들의 배일감정을 짙게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나는 70년대초 '잡초' 란 영화를 만들때부터 미국영화와 내 영화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그 천착의 결과가 꽤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는 작품이 바로 '족보' 다.

우선 나는 카메라 앵글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앵글을 정 (靜) 적인 상태로 고정시킨 뒤 그 고정된 틀속에서 소도구 등의 미장센 (화면구성) 을 통해 동 (動) 적인 움직임이 배어나오도록 했다.

나는 이런 정중동 (靜中動) 이야말로 농경사회에서 살면서 체질화된 우리식 미학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도 '족보' 를 내 작품중 '굉장히 잘 찍힌' 영화로 평가하길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족보' 의 주인공 설진영은 순창 설씨 집안의 실제 인물이 모델이었다.

소설속에서 그는 돌은 안고 우물에 빠져 죽는 걸로 나온다.

일경 (日警) 의 간섭이 하도 심하다보니 장례식조차 식구들끼리 단출하게 치른다.

그러나 나는 영화에서 이 장면을 확 바꿔버렸다.

엑스트라를 대거 기용해 성대한 장례식으로 꾸몄다.

문상객들도 모두 흰옷을 입게 해 검정옷을 입고 문상을 오는 다니와는 확연히 대비되게 했다.

나중에 이 장면을 두고 일본의 영화평론가 요모다 이누히코 (四方田犬彦) 는 "흰색은 이미 우수 (憂愁) 의 색깔이 아니다. 한민족의 뿌리로서 군림하는 풍요롭고도 강인한 색" 이라고 평했다.

나는 주인공의 이미지에서도 상식을 깼다.

원작에 묘사된 깡마른 선비형 대신 몸집이 큰 부잣집 사람처럼 주인공을 꾸몄다.

주선태가 그 몫이었다.

이때문에 TV드라마에서 장민호를 썼던 각색자 한운사씨는 불만이 컸던 모양이다.

이런 데에는 내 나름대로의 '계산' 이 있었다.

당시 설진영은 적잖은 농토를 가진 부자로 적당히 친일 (親日) 을 한 사람이었다.

단지 창씨개명만 거부했을뿐이었다.

나는 그런 점이 우리 선비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어릴적 보았던 전라도 토호의 모습을 섞어서 '제3의 인물' 로 주인공을 창조했다.

나중에 한운사씨도 이런 내 결정에 흡족해 했다.

'족보' 는 우리 영화로는 최초로 일본에 소개된 영화다.

당시 NHK를 통해 방영돼 "일본인의 리얼한 묘사가 상당히 가치중립적" 이라는 평을 받았다.

일본 평론가들은 지금도 '족보' 를 내 작품중 대표작으로 꼽는다.

글=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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