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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위기를 맞지 않기 위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0호 02면

어릴 적 시시포스의 신화 얘기를 들으면서 그가 느꼈을 무력감에 전율한 적이 있다.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그 마음이 오죽하랴 싶어서였다. 그때의 무력감을 요즘 이 정부에서 다시 느끼고 있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며칠 전 금융감독 당국은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에게 중징계를 결정했다. 우리은행장 시절 파생상품에 투자해 막대한 손실을 본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나는 한 달여 전 이 칼럼에서 이를 ‘또 하나의 마녀사냥’으로 규정했다. 황 회장 책임이 없다는 게 아니라 책임 소재와 경중을 정확히 따져야 한다고 했다.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감독 당국과 우리은행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의 책임도 못지않다고 했다. 하지만 감독 당국은 이를 귓전으로 흘렸다. 그러고는 황 회장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지웠다. 장담하건대 이 결정은 앞으로 두고두고 감독 당국의 위상에 큰 상처가 될 게다.

또 황 회장이 우리은행장 시절 파생상품을 감독 당국 주장대로 ‘무리하게’ 샀다고 치자. 그러나 황 회장이 우리은행장을 사임한 2007년 3월 이후 금융위기가 닥칠 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새로 취임한 행장에게도 팔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황 회장과 후임 행장의 책임은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에서 묻는 게 옳지 않을까. 하지만 황 회장에게는 중징계가, 후임 행장에게는 경징계가 내려졌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될 소지도 있다. 미국은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 프레디맥과 패니메이 등의 국영 주택담보대출기관과 AIG보험·씨티그룹 등 민간 금융기관들도 엄청난 손실을 봤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사표만 받았을 뿐 별다른 징계를 하지 않았다. 누가 가장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위기를 자초했는지를 가려내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일 게다. 하긴 정부와 은행, 보험사, 투자자 모두 책임이 있는데 누가 누구의 책임을 따질 수 있으랴.

책임을 묻지 말고 이대로 덮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많은 국민을 거리로 내몰고, 더 많은 국민을 곤경에 빠뜨렸고, 나라 경제를 마이너스 성장으로 만든 진상은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려 해도 사태의 전말이 정확히 드러나야 가능하다. 그래야 다음 실수를 피하는 국가적 교훈도 얻을 수 있다. 그러려면 경제위기 백서를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제2의 외환위기가 닥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신용경색으로 연쇄 부도를 걱정하던 게 불과 엊그제 일이다. 하지만 경제가 회복되면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며 잊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은행이 대표적이다. 이번 경제위기 때 우리의 충격이 상대적으로 더 컸던 건 은행 탓이 크다. 그들이 앞다퉈 대출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예금보다 대출이 30% 이상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교훈은 벌써 잊고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 늘리기 경쟁에 한창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부실로 마음 졸인 적이 참 많았다.

자칫했으면 가계와 은행 부실이 한꺼번에 터질 뻔했다. 그 위험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다시 도입하는 데 줄곧 망설였다. ‘거품을 거품으로 끄겠다’는 속내 때문이겠지만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잊혀져 가는 위기의 교훈을 되살려 다음의 위기를 막기 위해 백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외환보유액이 많아 외환위기는 없을 것이라던 정부의 호언이 틀렸다는 것도 백서에 기록돼야 한다. 외국인들의 주식 투자 자금이 일거에 빠져나가면서 제2의 외환위기가 일어날 뻔했던 것도 잊어선 안 된다. 그래야 외환보유액을 얼마나 쌓아야 또다시 외환위기를 겪지 않을지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외화자금 흐름을 예의주시하지 않고, 외화 부채와 채권의 만기 구조를 등한시한 감독 당국의 책임도 명기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금융 감독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백서는 책임 소재와 경중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하지만 책임 회피에는 선수들인 감독 당국 사람들이 수용할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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