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자승자박된 휴전선 선전수단 제거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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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북 군당국이 어제까지 완료키로 했던 휴전선의 선전수단 제거작업이 무산됐다. 3단계 제거작업 중 1,2단계에서 우리 측은 선전수단을 모두 제거했다. 그러나 북측은 김일성 찬양 돌글씨 등을 철거하지 않는 등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북측은 이런 문제를 포함해 나머지 제거작업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실무접촉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무성의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수시로 침범하는 북측의 태도를 감안하면 장성급 회담 합의는 사실상 사문화될 위기에 처했다. 당초 남북 간 긴장완화의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여겨졌던 이 합의가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우선 북한은 '얻을 것은 얻었으니 합의사안을 깨도 무방하다'는 단기적 전술방식을 이젠 바꿀 때가 되었다. 남북 간에도 신뢰가 최우선의 문제고 국제사회에서도 약속 이행의 신뢰구축은 대외 신인을 위해 필수적 과제다. 쌀 지원을 받기 위해 장성급 회담에는 응했으나 군사문제는 미국과만 논의해야 한다는 식의 단기적 대응전략은 남이나 국제적 신뢰관계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자세다. 국제사회에서의 신뢰회복은 북한 경제 재건의 첩경이고, 또 그 첫걸음은 남북 간 합의의 성실한 이행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북한도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이젠 확인했을 것이다.

북한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합의에 응한 정부의 협상자세도 문제다. 합의서에 'NLL' 대신 '서해상'이라는 표현과 '선전수단의 재설치 금지'라는 어구를 담게 한 것이 단적인 예다. 남북 간 충돌을 막기 위한 핫라인 개설 등 각종 조치의 기본전제는 북한의 'NLL 인정'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감으로써 북한에 NLL 침범 소지를 남겨주는 결과가 된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북한의 합의 위반에 따라 우리가 선전수단을 다시 설치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자승자박의 꼴이 되어버렸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북한과의 '엉성한 합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