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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 (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시나리오가 완성되자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92년 10월 22일 3차 촬영이 기점이 됐다.

촬영지는 충남 온양의 민속마을이었다.

'유봉' 이 대감 잔치집에서 '춘향가' 의 어사출도 대목을 부르는 장면이었다.

나는 극의 분위기상 흥겨움이 필요했다.

'춘향가' 중에서 이 어사출도 장면이야말로 가장 그럴듯한 대목이란 생각에 별로 고민없이 택했다.

그러나 구경꾼이 문제였다.

서울에서 동원한 엑스트라조합 사람들이 영 분위기를 맞추지 못했다.

소리꾼 (유봉) 의 창 (唱)에 따라 추임새를 넣으며 흥을 돋궈야 하는 데 도무지 흥이 나지않았다.

그래 대충 마치고 나중에 다시 찍기로 했다.

결국 이 신이 완성된 곳은 20여일후 전남 해남에서였다.

장소는 대흥사 아래 유선여관이었다.

소리를 즐길 줄 아는 이곳 주민들을 끌어 모아 잔치집 손님 역할을 맡겼다.

클라이맥스는 "암행어사 출도여!" 를 다함께 따라부르는 곳이었다.

그러나 영화 출연이라고는 난생 처음인 이곳 주민들도 쭈뼜쭈뼜하기는 매일반이었다.

그때 일행중 한 사람이 외쳤다.

"아,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들어야 흥이 나오제" .결국 나는 촬영현장의 금기를 깨고 술 한배씩을 돌렸다.

너나 할 것없이 거나하게 취한 상황에서야 분위기가 살아났다.

촬영중 이런 식의 해프닝은 약과였다.

연출부에서조차 "왜 이렇게 영화가 복잡하냐" 는 푸념이 대단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송화' 와 '동호' 역에 각각 세명의 배우가 동원됐다.

이러다보니 그때그때 출연자가 바뀌는 등 북새통을 떠는 일이 다반사였다.

감독 : "여기서 유랑장면을 찍자. 구름이 있고 산이 있으니…. "

조감독 : "저, 그런데 어떤 유랑이죠?"

감독 : "다 큰 동호와 다 큰 송화. "

조감독 : (무전기를 꺼내고) "송화.동호 3팀 (오정해.김규철) 나와라, 오버. "

흔히들 지금도 명장면이라며 칭찬해주는 '진도아리랑' 신은 세차례의 촬영끝에 완성됐다.

촬영지는 완도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청산도란 외딴섬이었다.

이곳은 땅이 척박하다보니 계단식 밭이 많았다.

나는 비스듬한 언덕길을 발견하고는 '원신원컷' 촬영을 결정했다.

'진도아리랑' 을 부르며 걸어오는 유봉.송화.동호. 첫 커트는 실패였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오정해의 치마를 종아리 위까지 치켜올린 탓. 두번째 촬영은 필름이 중간에 끊겨서 NG.세번째 가서야 나는 OK사인을 보냈다.

5분40초짜리 '롱테이크' (장시간 촬영) 는 이렇게 완성됐다.

한밤중 닭 해프닝도 있었다.

유봉이 이웃마을에서 훔쳐온 닭을 송화에게 건네주며 "먹어라" 하는 장면이었다.

김명곤이 닭다리를 뜯어 오정해에게 건네주는 순간, 앙상한 '닭뼈' 가 드러났다.

소품담당의 실수였다.

닭죽에서 백숙으로 콘티 (촬영대본)가 바뀐 것을 몰랐던 것이다.

소품조수는 새벽2시 근처 시장에 가서 생닭을 구해왔다.

'서편제' 에서 판소리는 극의 진행 순서에 따라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순으로 쓰였다.

나는 내용상 돈이 궁한 부분이라면 '흥부가' 의 돈타령을 넣어 역설적인 효과를 냈다.

촬영 후반부에 들어서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송화' 가 명창의 단계에 이르렀는데 오정해의 소리는 아직 완숙하지 못했다.

고민끝에 다른 목소리를 넣기로 했다.

나는 오정해와 같이 김소희 선생의 제자이자 음색이 비슷한 안숙선에게 소리를 청했다.

그래서 낙산거사가 회상에 잠길 때 흐르는 '범피중류' 부터는 안숙선의 소리다.

나는 녹음.편집.믹싱 등 모든 후반작업이 끝난 2월 18일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스태프들만 보는 기술시사회를 가졌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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