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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대학살서 교훈얻자"올 베를린영화제 화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금세기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은 영화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2일 (한국시간) 폐막되는 제49회 베를린영화제의 최대 화두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이었다는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주목받는다.

개막작인 독일영화 '에이미와 재규어' 는 나치정권 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나치학정 고발에서는 그야말로 '서곡' 에 불과했다. 경쟁부문에 출품된 미국 제임스 몰 감독의 다큐멘터리 '마지막 날들' , 이스라엘 에얄 사이반 감독의 다큐멘터리 '스폐셜리스트' , 스페인 코미디 '당신이 꿈꾸는 여자' 등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줄줄이 선보였다.

'마지막 날들' 은 1944년 헝가리 학살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의 미국인 생존자의 인생역정을 담고 있다. 제작자는 이미 '쉰들러리스트' 를 통해 이 소재를 다룬 바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 속의 실제 주인공들과 함께 영화제에 참석한 스필버그는 "히틀러 정권의 수도였던 베를린에서 이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고 강조했다.

한편 '스페셜리스트' 는 히틀러에게 신임을 얻고 유대인 대학살 프로그램을 수행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을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 이 다큐엔 1961년 아이히만에 대한 전범 재판 장면 등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사이반 감독은 "내가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은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죄악" 이라고 소감을 피력해 눈길.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신은 '나치' 라는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며 현세와 후세에 경고가 될 만한 책을 집필할 수 있도록 석방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결국 62년에 사형당했다.

스페인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의 '당신이 꿈꾸는 여자' 는 요셉 괴벨스 나치 선전상을 소재로 한 슬랩스틱 코미디. 대학살을 뒤로 깔고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는 오히려 역사적 사건과 시간적.정서적 거리를 두고 유머와 페이소스를 가미해 주목받았다.

이런 영화들을 많이 받아들인 영화제측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 모리츠 데 하델른은 "독일인들이 아직 '유대인 학살' 을 정면으로 보기를 꺼려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자세를 갖고 있다" 며 "올해 베를린 영화제가 '유대인 학살' 을 다룬 좋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게 된건 행운" 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대학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이라고 역설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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