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교제의 유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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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해외여행 시 동반해줄 미모의 젊은 여성이나 색다른 경험을 가져다줄 섹스 파트너를 구해준다는 분홍빛 메일이 들어와 있다.

곽대희의 성 칼럼

지나가기조차 거북한 적선지대를 어슬렁거리지 않아도 이렇게 매력 있는 여자를 소개 받는 루트가 있으니 세상살이가 참 편해졌다는 느낌이다.

간혹 비뇨기과를 찾아오는 중년 남성들이 10대 소녀들을 동반하고 오는 것도 바로 이런 소개 루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이 흔히 팔려고 내놓는 것은 대개 원조교제라는 형태의 매춘이다. 프리섹스 사조로 말미암아 소녀들은 자신의 정조 가치를 그다지 대단하게 인식하려 들지 않는 경향이 있고, 부자들은 소녀와의 섹스에 천금을 아끼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경제사정을 살펴보면, 19세기 말 영국의 그것에 비할 만큼 소녀들이 가난한 것도 아니다.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문명에 부수해서 나타난 높은 소비성향이 그녀들을 매춘의 길로 유인했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생활경비를 아끼고 허리띠를 꽉 졸라매는 절제된 생활을 영위했더라면 팔지 않아도 될 정조를 싼값에 팔아 넘기는 젊은이들은 너무 약삭빠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원래 매춘은 절대적 빈곤의 산물이고 요즘처럼 처녀매춘이 시작된 것은 영국이란 이름의 선진국이다. 순결한 처녀를 가까이하면 회춘한다는 학설이 지지를 얻으면서 고작 바람난 유부녀나 과부들을 대상으로 잔돈푼이나 뿌리면서 엽색행각을 하던 남성들이 갑자기 ‘처녀 교제’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사회는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로서 가난한 도시빈민들은 자본가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강요 받으며 살아갔다. 그런 사회였으므로 당연히 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 사람의 값이 정해지고 이 가격경쟁에서 여성과 어린이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자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여성 특히 소녀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처녀 매춘’ 쪽에서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의 사회적 실상을 그린 이반 블로프의 『병든 사회』라는 저서에 ‘런던에서는 처녀 능욕을 알선하는 밀매음 조직이 왕성하게 영업활동하고 있다. 이들 처녀의 대부분은 어린 소녀였으므로 자신들의 의사와는 달리 그 희생으로 제공되는 매춘 범죄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매춘시장에 겁없이 뛰어들었다.

노예처럼 폭행당하며 소녀들은 묵묵히 자신의 몸을 팔았고 이 과정에서 배를 불리는 업자들은 당국의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영국 전체가 매춘산업에 빠졌다 할 정도로 사회가 크게 병들어 있었다’라는 글을 남겼다. 윌리엄 스테드는 1884년 영국의 빈민굴 생활을 이렇게 묘사해 놓았다.

“1870년대까지 남녀의 섹스는, 대부분의 경우 농후해진 음탕함에 비례해서 수치심이 자라지 않았다. 낮 동안 중노동으로 기진맥진한 여공은 누가 자신을 범했는지 전혀 모를 만큼 크게 지쳐 있었다.”

천인공노할 이런 부조리는 20세기 초, 빈곤층의 생활환경 개선, 미성년 여성의 법적 보호 등 사회복지정책이 실시되면서 힘들게 해소되었다. 가난이 몰고 온 모든 사회악을 해소하는 데 100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소리 없이 번지는 ‘원조 교제’를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긴 시간을 그것이 몰고 온 도덕적 해이의 청소에 경주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기조차 부담스럽다.

곽대희비뇨기과 원장

<이코노미스트 9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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