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美도 놀라는 DJ 대북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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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치 천천히 걷히는 안개 속을 빠져 나오듯 김대중 (金大中) 정부 대북정책의 등신대 (等身大) 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종래의 그것과는 발상부터가 다르고 미국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획기적이다.

어디가 그렇게도 다른가.

법적인 (De jure) 통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정치적인 통일을 보류하고 솔직하게 사실상의 (De facto)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이 정책의 특징이다.

사실상의 통일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남북한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분단상황의 평화적인 관리' 다.

그것은 분단이라는 현상의 동결이고, 따라서 통일에는 반대되는 정책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책임있는 고위 당국자는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뛰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북한이 미사일과 수상쩍은 지하시설로 거듭 말썽을 부리는 것은 생존권을 보장받고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자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 정권을 인정하고 경제제재를 완화해 미국의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를 하고 북한과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되면 북한이 벼랑끝 전술을 더 쓸 이유가 없어진다.

미국은 미사일문제가 터지면 그걸 해결하고, 금창리 시설이 문제가 되면 거기 매달리는 식으로 북한의 작용에 반작용으로만 대응한다.

그런 대증요법으로는 북한에 끌려만 다닌다.

크게 주고 크게 받는 빅딜같은 일괄타결 방식을 택해야 한다.

냉전구조라는 게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과 군비경쟁이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인정하고 북한이 거기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면 냉전구조는 해체할 수 있다.

그리고 대량 살상무기를 해체하면 남북한이 상호불신을 해소하고 화해하고 협력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다.

한국정부는 이렇게 미국에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볼 것과, 전술차원이 아니라 전략차원에서 북한문제에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북한을 먼저 인정하고 경제제재를 해제하고 나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자고 한다.

고위 당국자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총점검한 이른바 '페리 보고서' 가 한국정부의 이런 정책변화를 담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미국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한국문제 해결의 주체인 한국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국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한국의 주문대로 남북관계 개선의 속도에 구애받지 않고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두가지 불확실한 게 있다.

미국 국내정치의 분위기상 그렇게 과감한 정책을 펼 수 있을까. 그리고 북.미협상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둬도 한국의 여론이 환영할까. 정치적인 통일보다 사실상의 통일을 지향하고, 미국더러 한국보다 앞서가면서 더 과감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놀라운 변화는 정부의 어떤 자신감에 바탕을 둔 것 같다.

그것이 어디서 오는 자신감인지는 확실치 않다.

짐작컨대 서울과 평양간의 물밑 교감이 아닌가 싶다.

도쿄 (東京) 와 워싱턴에서 3월 위기설이 분분해도 서울은 천하태평이었던 것도 '우리는 북한을 안다' 는 자신에서가 아니었을까. 분단관리의 정책은 예기치 않은 대폭발 (빅뱅) 이 없는 한, 그리고 중국이 북한의 붕괴를 좌시할 생각이 없는 한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 같다.

서독의 동방정책도 통일정책이 아니라 분단관리를 통한 평화공존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엄격한 상호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경제제재의 해제를 포함한 가시적인 양보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넙죽 넙죽 받기만 하고 주는 것이 없을 때 한국의 여론과 미국 의회의 반발을 무마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사일 발사와 잠수정 침투 같은 도발이 되풀이되면 일은 더욱 복잡해진다.

결국 신뢰의 문제다.

베일을 벗는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은 큰 장애물을 만나기 전에 전문가집단의 진지한 토의와 검증에 부쳐져야 하고 공론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그 타당성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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