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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비닐하우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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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는 미국에서 촬영되지 않았다. 익숙한 미국 지명이 나오고,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오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미국인이지만 촬영 장소는 스페인 알메리아 지방이었다. 이곳은 이탈리아 감독들이 만든 ‘스파게티 서부극’의 단골 촬영지였다.

알메리아를 세상에 알린 것은 1960년대 서부극만이 아니다. 지구 밖에서 보인다는 인공 구조물이 한몫했다. 바로 서울 절반 넓이의 비닐하우스 촌이다. 이곳은 과학자들에게 지구에 설치된 거대한 거울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구의 햇빛 반사나 복사열의 변화를 측정하는 지점으로 활용됐다. 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의 폭발로 분진이 성층권에 퍼졌을 때 유럽 과학자들이 화산 폭발과 지구 기온의 관계를 밝히려 집중 관찰한 곳도 알메리아였다.

알메리아 황야는 수백 만t의 채소와 과일을 생산해 여러 나라에 공급하는 금싸라기 땅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환경 영향은 두고두고 논란거리다. 유엔환경계획(UNEP) ‘지구 환경 전망 보고서’는 74년과 2004년의 위성사진을 제시하며 알메리아를 대표적인 환경 급변 지역으로 꼽았다. 지하수와 토양이 농약으로 오염됐다는 폭로도 이어졌다. 연간 100만t에 달한다는 작물쓰레기는 여전히 골칫거리다.

돈방석에 앉은 알메리아 사람들이 위기를 느낄 만했다. 알메리아 대학 연구진이 비닐하우스의 긍정적 효과를 찾아냈다. 약 30년간 스페인 다른 지방에서 기온이 1도가량 상승할 때 알메리아에서는 반대로 0.9도 떨어졌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것이 비닐하우스가 빙하처럼 햇빛을 반사하는 ‘알베도 효과’ 때문이고, 여기에 지구온난화를 막을 희망이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비닐하우스는 희망이었다. 60년대 중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난한 농촌을 구할 처방으로 내놓은 것이 은빛 비닐하우스였다. 한겨울에도 싱싱한 푸성귀가 자라는 비닐하우스는 우리 식탁과 입맛을 바꿔놓았다. 오갈 데 없는 서민, 재난을 당한 사람도 비닐하우스에 살며 희망을 키웠다. 건물 신축이 안 되는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에서는 가건물로 이용됐다. 정부는 비닐하우스로 훼손된 그린벨트에 서민용 보금자리 주택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이 틈에 보상 대박을 꿈꾸며 비닐하우스를 세우거나 주소를 비닐하우스로 옮기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비닐하우스의 용도는 다양하기만 하다.

허귀식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