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코소보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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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럽문명의 중심에서 보면 코소보는 멀리 동남쪽의 변방에 떨어진 한적한 벽촌 같은 지역이다.

인구 겨우 2백만명. 그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고장의 민족분쟁이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의 큰 두통거리로 등장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코소보사태는 보스니아사태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다.

옛 유고슬라비아 내부의 민족분규가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고 있어 코소보를 방치하면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대규모의 국제분쟁으로 확대 재생산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코소보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처음에 코소보의 비극은 빈사상태의 공산주의가 민족주의로 변장하고 벌이는 최후의 발악일 뿐 지금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코소보는 세계자본주의 시스템에 편입되느냐, 거기서 제외되느냐를 둘러싼 포스트 냉전형 분쟁의 성격을 드러낸다.

역사에서 코소보사태의 기원을 찾자면 6백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89년 6월 28일. 세르비아 남부의 코소보평원에서는 중세의 '워털루 회전' 이라고 할만한 전투가 벌어졌다.

무라트1세가 이끄는 오토만 터키의 군대와 세르비아 국왕 라자르가 지휘하는 불가리아.헝가리.알바니아의 기독교연합군의 격돌이었다.

코소보평원의 일패도지 (一敗塗地) 로 세르비아는 멸망하고 5백년에 걸친 오토만 터키의 발칸지배가 시작됐다.

기독교도들인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떠나고 오토만 터키는 일리리아족의 후예로 이슬람교도들인 알바니아인들을 코소보로 이주시켰다.

오늘날 코소보가 알바니아계 90%와 세르비아계 10%의 인구비율을 갖게 된 배경이다.

발칸의 민족분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이 유고의 동서분할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일리리아 사람인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293년 로마를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했다.

그 분할선이 유고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유고는 3세기에 이미 동방정교 문화권과 서쪽의 가톨릭문화권으로 분단됐던 것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세르비아대통령 밀로셰비치는 자신이 보스니아.알바니아의 이슬람문명권의 위협에 대항하는 유럽 기독교문명의 최후의 보루라고 자처한다.

발칸을 양분하는 경계선은 빈부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슬로베니아는 옛유고에서도 가장 북서쪽에 위치해 서구문화권에 속하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가 오토만 터키의 지배를 받는 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슬로베니아의 생활수준은 코소보의 5배나 된다.

코소보의 많은 젊은이들은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된다.

그래서 그들은 코소보의 자치보다는 독립을 요구하는 데모를 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가 독립하면 알바니아와 통합할 것을 걱정한다.

그래서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는 초강수를 썼다.

그 결과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가 무력충돌한 것이 코소보사태다.

NATO의 모호한 태도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미국과 유럽은 처음에 유고의 민족분규는 수백년에 걸쳐 민족적.종교적 갈등이 쌓인 결과여서 분규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우선돼야 한다면서 민속학적 동기에서 중립을 택했다.

이런 결정론적 입장은 과장된 역사와 전통을 앞세워 타민족 학대를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천박한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위선이다.

밀로셰비치를 거세하면 발칸에 불안한 힘의 공백이 생긴다는 유럽의 우려도 19세기적 세력균형론의 망령일 뿐 설득력이 없다.

지난해 10월 성립된 휴전협정을 지키는 문제에 관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NATO는 코소보에 자치를 돌려주지 않으면 세르비아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하지만 밀로셰비치는 지상군투입 문제로 NATO가 분열돼 폭격이 쉽지 않음을 안다.

핍박받는 쪽이 이교도들일 때 유럽의 대응은 더디다.

미국과 유럽은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사태를 시기를 놓쳐 지금은 가래를 들고도 쩔쩔 맨다.

사담 후세인 난타에 쏟는 힘의 반의 반만 써도 될 일을 가지고….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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