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세상보기]패러다임을 또 바꾸자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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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90년대 초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자본주의는 승리했다.

지금 지구를 지배하는 유일한 경제이념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나뿐이다.

나라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려 하고 있고, 중국처럼 막 배우기 시작한 나라도 있다.

한국 같은 나라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 발전을 꾀하고 있다.

그런데 엊그제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본주의의 착취성과 사악성에 주의하라는 '권고문' 을 발표했다.

그는 이 권고문에서 이윤 동기나 시장법칙, 경제적 인간 등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물질을 추구하는 과정이 비인간화로 흐를 것을 경계한 말인 것 같다.

우리가 지향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야단을 맞고 있다면 왜 그런지 귀를 기울이고, 한번쯤 우리의 목표를 재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논법 (論法) 이 성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버려 놓는다/한국 사회는 자본주의를 숭상한다/고로 한국 사회는 사람을 버려 놓는다.

(이렇게 되면 정말 곤란하지!)

그렇지 않아도 국제통화기금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경제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

패러다임은 어형 (語形) 변화라는 문법 용어에서 전의 (轉義) 해 모범이나 실례 (實例) 를 뜻하는 말이 됐다.

바람직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이뤄지는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인간 중심의 지식 가치 사회로 탈바꿈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신인본주의 (新人本主義) 라고 부른다.

그 명칭이야 어떻든 무언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려는 꿈틀거림이 새 천년을 맞는 시점에서 태동 중이다.

산업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얘기는 그전부터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정작 뭘 어떻게 바꾸자는 것이냐고 물으면 기껏해야 굴뚝경제의 부작용을 해소하자는 정도에 그친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자는 얘기까지는 가지 못한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우리 경제의 당면문제도 구조조정을 진척시키고 일자리를 늘리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다.

경제의 구조조정은 과잉설비를 정리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세계의 산업국가는 모두 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생산설비도 과잉이고 소비와 부채도 과잉이다.

욕망도 기대도 과잉이다.

얼마전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세계 경제의 두통거리는 바로 과잉설비로 인한 공급과잉이라고 진단했다.

과잉투자가 이뤄진 원인은 고도성장을 기대한 경쟁 - 기업은 기업끼리, 국가는 국가끼리 -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성장이니 경쟁이니 하는 거품 섞인 단어와는 영원히 결별하는 것이 지구적인 덕목이다.

과잉설비.과잉투자가 이뤄졌는데도 일자리는 왜 모자라나. 그것은 과잉 노동력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세계의 재화를 생산하는 데는 현재 노동력의 20%면 충분하다는 주장이 있다.

생산기술의 혁신은 더욱 빨라져 앞으로 30년 후면 현재 노동력의 2%로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있다.

이렇게 보면 근본문제는 세계 인구가 너무 많은 데 있지, 일자리가 부족한 데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인구 증가를 정지시키거나 숫자를 줄여 나가자는 범세계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세계 최고 인구 조밀국인 한국도 당연히 이 대열의 선두에 서야 한다.

이 정도의 혁신적 사고가 이뤄져야 비로소 패러다임의 변화를 논할 자격이 있다.

매일 그렇고 그런 얘기를 하며 세상을, 인생을 변화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은 지루하고 답답할 뿐이다.

이 모든 변화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작업은 정치로 수렴돼야 실천력이 생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정치는 당쟁으로 날이 새고 정쟁으로 해가 저문다.

한국 정치의 오늘은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 같다.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유행어도 모르는 한국 정치인들은 원시인 (原始人)!

김성호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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