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지역감정 어떻게 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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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위기의 경제난국을 보낸 지난 1년간 우리가 잊거나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외국의 유수 신용평가기관들이 투자적격 수준으로 한국을 다시 격상시킨 데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환란 (換亂) 극복을 위한 적절하고도 신속한 대응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가능케 한 저변에는 치열한 노사분규나 대규모 학생시위가 없었기에 비교적 이른 시일 안에 어둠의 터널을 벗어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잊고 있다.

되돌아 보자. 불과 몇달만에 1백80만명이라는 실업자가 무더기로 직장을 잃었다.

대학 졸업생이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꽉 막힌 위기상황이 연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 1년간 붉은 띠를 맨 노동단체들의 살벌한 분규나 대규모 시위를 별로 보지 못했다.

봄이면 등록금 인상반대를 불씨로 해서 정권퇴진운동으로 나갔던 학생데모가 지난 1년간 단 한차례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은 채 살고 있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날고 쫓고 쫓기는 경찰과 시위대의 난투전을 본지가 언제였던가.노동자와 대학생 시위가 없었기에 환란의 위기를 넘겼고 또 이런 분규나 시위가 앞으로도 없으리라 믿기에 우리 경제가 밝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이것이 金정부 집권의 최대 성과물이라 평가하고 싶다.

노사정위원회의 원만한 활동으로 노동세력의 불만을 가라앉힌 탓일 수도 있다.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는 내부적 자성 (自省) 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노동자와 대학생이 노학 (勞學) 연대를 내걸고 거리를 점령하거나 대학 캠퍼스에 불을 지를 때도 지금처럼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절박하게 걸려 있지 않았다.

날치기 노동법 개정 반대나 '전.노 (全.盧) 처단' 등 노동자나 대학생들과의 직접 이해가 지금처럼 심각하게 걸려 있지 않은 문제를 두고 사생결단의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만약 지금처럼 세차례 연속 날치기 국회에 안기부의 정치사찰의혹 같은 사건이 그때 일어났다면 환란이고 경제난이고 가릴 것 없이 전국은 대규모 시위로 쑥밭이 됐을 것이다.

金정부 집권 이후 이게 없어진 것이다.

왜 이런 다행스런 결과가 나온 것인가.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시위 주체와 명분의 상실이라고 본다.

보다 정확한 표현을 쓴다면 우리가 '광주의 한 (恨)' 에서 벗어났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한다.

모든 시위나 분규의 진원지가 광주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광주의 금남로 광장이 잠잠한 이상 세상은 조용했다.

광주가 움직이면 정권이 불안했고 광주가 움직이면 사람들은 기가 죽었다.

수백명 고결한 생명을 앗아간 광주항쟁의 원한을 광주 밖의 사람들은 알고 있기에 죄책감을 지고 산 것이다.

광주의 한이 뭉쳐 민주화 투쟁.노학연대.재야투쟁으로 연결됐기 때문에 크고 작은 시위나 분규가 광주와 무관했다고 볼 수 없었다.

그 연속된 투쟁의 종착역이 정권창출로 끝난 지금 와서 시위의 주체가 따로 있을 수 없고 시위의 명분이 아직은 생겨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1년 광주가 조용했다.

대규모 시위나 분규도 없었다.

광주의 한에서 우리 모두가 풀려났기 때문에 대규모 시위나 분규가 사라졌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흔히 지역감정이라고 말하는 영.호남 대결은 두개의 축을 지닌다.

그 하나의 축이 광주의 한이다.

이 한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광주의 광주화' 와 '호남의 호남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호남대 비호남의 대결, 친여와 재야, 보수와 진보개념으로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또다른 축은 영남세력이 군사정권의 지팡이 끝을 잡고 장기집권을 하니 호남대 영남간의 적대의식이 깊어졌고 광주의 한을 품은 호남의 호남화와 지난 영광에 대한 영남의 향수가 남아 망국병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망국병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지역감정을 떠받드는 두 축을 허물어야 한다.

먼저 호남의 호남화를 깨뜨려야 한다.

호남에 의한, 호남을 위한, 호남만의 호남이 아니라 호남의 전국화를 해야 한다.

광주의 한을 푼 지금껏 호남인끼리 한풀이를 한다는 말이 나와선 안된다.

국민회의가 '호남당' 아닌 전국당으로 발전할 수 있는 호남의 전국화 노력이 절실하다.

또 하나의 축인 영남세력이 이젠 과거의 향수에서 깨어나야 한다.

군인들이 내민 지팡이 끝을 잡고 일어섰던 과거를 부끄러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부끄러운 과거에 기름을 붓고 바람을 불어대며 성냥을 그으려 드는 야당의 장외집회나 투쟁도 부끄러운 과거를 모르는 시대착오적 정치행태다.

그래서 끝내야 한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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