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에 묻는다]9.민주주의는 실현 불가능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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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민주주의란 '인민에 의한 지배' 를 뜻한다.

이는 시민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평등한 지위를 향유할 때 비로소 완벽하게 구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대다수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현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여타 권위주의 체제와 구분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통상 형식적.절차적 측면에 착안하여 정의한다.

시민들에게 보통선거권이 부여되어 있으며 공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대부분의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입헌적.대의제적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바로 민주주의를 형식적.절차적 측면에 주목하기 때문에 '형식적 민주주의' 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에 대해 '실질적 민주주의' , 곧 형식적 민주주의의 '내포적 심화' 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주변화되고 소외된 모든 계층의 정치적 평등은 물론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평등이 상당 수준에서 확보되고, 나아가 정치 참여가 직장.산업체.학교 등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 확산되는 체제를 지칭한다.

요컨대 실질적 민주주의는 현존 자유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평등과 참여의 요소를 강화하고자 한다.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의 많은 권위주의 정권은 물론 구 (舊)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민주화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는 범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민주적 정치체제가 1972년의 44개국에서 1994년 당시 1백7개국 (총 1백87개국 중) 으로 증가하였다고 보고한 1994년에 실시된 한 조사는 이를 뒷받침한다.

이같은 '외연적 확산' 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민주주의에 관한한 20세기의 인류는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내포적 심화' 라는 차원에서 보면 신생 민주국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서구 선진 민주국가에서도 민주주의가 정체 또는 역전됨으로써 부진을 면치 못하는 우울한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내포적 심화가 부진한 주된 원인으로는 대체로 몇 가지 중요한 요인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최근 영국,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주요 민주국가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재집권에도 불구하고, 1980년 이래 전반적으로 목격되는 신보수주의의

발흥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실질적 기반의 약화를 들 수 있다.

또한 현대 자유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환멸 또는 무력감에 의해 더욱 심화하고 있는 정치적 무관심의 팽배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현상이다.

나아가 최근 정보통신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초래한 직접민주주의 - 전자민주주의, 원격민주주의 등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많은 기술 문명 비판자들이 지적하듯이 현대의 기술체계가 인간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억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 체제를 창출한다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이외에도 무정부적 국제질서 하에서 국가 안전을 추구하는 군사.안보정책이 서구 선진 민주국가 조차에서도 소수 정책 결정자들 수중에 극단적으로 집중되어온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지난 1년 동안 이른바 'IMF 신탁통치' 하에서 우리 모두가 절감해왔듯이, 오늘날 지구화에 따른 일국적 차원에서의 민주적 자결권의 위축은 후진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일국 차원의 민주주의가 갖는 실효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같은 요인들은 이른바 지구화를 통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보편화, 국제관계의 무정부적 속성, 눈부시게 발전하는 정보통신기술을 주축으로 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아울러 이러한 요인들은 또한 냉전질서의 종언 이후 전세계적으로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보편화와 맞물려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계급간의 국내외적인 역학관계가 민주주의의 내포적 심화에 불리하게 형성되고 있는 상황을 낳고 있다.

따라서 21세기 인류의 과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실질적 민주주의, 곧 평등의 심화와 참여의 확대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시민사회, 세계질서 세 가지 차원에서의 민주화가 동시에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세계질서의 민주화는 21세기 민주주의의 새로운 과제로 부각될 것이다.

종국적으로 21세기 인류는 지구적 차원에서 인류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와 달리 초국적 차원의 민주주의를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지구화로 인한 일국 차원의 민주적 자결권의 위축에 주목하여, 서구 학자들은 국제질서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UN의 민주적 개혁, 선언적 국제법 조항들의 실효성 확보는 물론 이른바 '민주주의의 범세계적 모델' 을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국적인 시민운동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지구화' 가 적극 추진되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지구화는 지구적 공동선 - 예컨대 핵전쟁 위험에 대한 공동 대처, 인류의 공동유산인 생태계의 보전, 세계의 빈곤한 인민들의 삶의 조건 개선 등 - 을 추구하는 것에서 그 추진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는 반민주적인 흐름과 세력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기 마련이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그나마 현상태로의 유지를 위해서도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다분히 유동적인 정치체제이다.

더욱이 현존 민주주의를 '인민에 의한 지배' 라는 고전적인 이상에 충실하도록 심화시키는 과제는 현상태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 프로메테우스적인 분발을 요구한다.

아울러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민주주의 체제는 '인민에 의한 지배' 를 관철시키기 위해 항상 새롭고 다양한 과제를 부여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심화시키는 과제는 한번의 노력으로 영구적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지프스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부단한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루소는 민주주의를 '인간에게 부적합하고 오직 신들의 나라에나 적합한 정치체제' 라고 언급했는지도 모른다.

강정인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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