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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73> 인수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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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엔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돌아오지 않는 다리 등등. 깎아지른 바위에도 길이 있고, 사연이 있습니다. 1억8000만~1억3000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에 생겨났다는 ‘대한민국 대표 바위’ 인수봉(810.5m)을 찾았습니다. 70여 년 전부터 만들어진 길들의 이름과 사연을 소개합니다.

김홍준 기자

누가 먼저 인수봉에 올랐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온조와 비류가 기원전 18년 한산(漢山)의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도읍을 살펴봤다는 내용이 있다. 부아악은 아기를 업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인수봉을 말하기도 하고, 북한산을 뜻하기도 한다. 이들이 과연 인수봉에 올랐을까. 사실이라면 어떻게 올라갔을까.

1926년 임무(林茂)가 후면 C코스로 오른 게 인수봉 초등이라는 설이 있다. 이듬해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 박사가 고독길을 통해 올랐다는 설도 있다. 설은 설일 뿐 기록이 없으면 인정받지 못한다. 인수봉 ‘공식 초등자’는 29년 5월 영국 외교관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근무한 클리프 아처(Cliff Hugh Archer)다. 그는 북면을 통해 등반한 뒤 기록(1936년 영국산악회에 제출)을 남겼다. 아처는 이때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올라가 있는 것을 봤다’고 기록했다. 게다가 정상에는 돌탑이 있었다. 아처 이전에 누군가 인수봉을 올랐다는 것이다.

인수B   한국인이 연 최초의 암벽길  그렇다면 ‘한국인 공식 초등자’는 누구일까. 35년 3월 20세의 김정태는 엄흥섭·김금봉, 그리고 일본인 이시이와 함께 인수봉 전면 벽을 올랐다. 이들은 전면 슬래브(slab·평평하게 기울어진 바위 면)로 오르지 않고 그 왼쪽의 직상 크랙(crack·바위의 틈)을 택했다. 하강은 후면으로 하지 않고 전면으로 했는데 이때 대슬래브 등반 가능성을 확인했다. 지금은 ‘성능’ 좋은 암벽화를 신고 평지를 걷듯 성큼성큼 오르는 대슬래브가 당시엔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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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A  ‘공포의’ 전면 대슬래브로 첫 등반  대슬래브를 통해 처음 길은 연 사람은 박순만이다. 그는 36년 10, 11월에 걸쳐 일본인 오우우치·오바·하마노와 함께 밑창이 두꺼운 등산화에 징을 박고 대슬래브를 올랐다. 잡목이 우거진 속칭 ‘오아시스’를 지나 오른쪽으로 난 침니(chimney·세로로 크게 갈라진 바위 틈)로 정상까지 길을 냈다. 그 뒤 박순만은 김정태와 함께 한국인들로만 구성된 백령회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백령회는 한국산악회로 탈바꿈했다.

취나드A, B  주한미군이 한국인과 개척   63년 9월 주한 미군 이본 취나드는 알음알음으로 선우중옥을 만났다. 의기투합한 두 사내는 이강오와 더불어 인수봉으로 향했다. 돈이 없어 37m 로프 하나와 카라비너(karabiner·개폐구가 있는 링 모양의 장비) 하나만 준비한 이들에 의해 취나드 A가 태어난다. 취나드 B는 개척에 들어간 지 단 하루 만에 이들에게 초등을 허락했다. 이곳은 접근이 쉽고 자연스러운 라인과 적당한 난이도를 갖춰 산악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코스이기도 하다. 취나드는 그 뒤 등산 장비업체 사업가로 변신했다.

비둘기  서면 하강길을 역류하다  산비둘기 산우회는 창립 이듬해인 66년 인수봉에 새 길을 내기 위해 나섰다. 당시 모든 산악회 사정이 그렇듯 장비를 마련하는 데만 1년 걸렸다. 오버행(overhang·바위 기울기가 90도를 넘는 곳) 밑을 지나 트래버스(traverse·횡단) 구간에 정으로 구멍을 내고 볼트를 박는데 ‘자세’가 안 나와 쥐가 자주 났고 해머까지 부러졌다. 코스 명은 산악회 이름을 땄다. 인수 야영장 샘터도 만들었다. 2007년 7월엔 회원 4명이 북한산 용혈봉을 지나다 벼락에 감전돼 목숨을 잃은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다.

하늘  쌀 다섯 가마 값 들여 4주 만에 완성  우정으로 똘똘 뭉친 이들을 당해낼 자 누구인가. 우정산악회는 69년 3월 도봉산 오봉에 노을을, 6월 인수봉에 우정 A.B를 개척했다. 9월에는 하늘을, 10월에는 동녘과 서면 슬래브에 길을 냈다. 거침없었다. 그들은 2만8000원(당시 쌀 80㎏ 한 가마는 5000~6000원, 라면 한 봉지는 10원)을 들여 하늘길을 완성했다. 20명이 참여해 4주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원래 첫 피치((pitch·등반 중간 중간 끊어지는 구간)에는 볼트가 없었다. 가족과 함께 인수봉을 찾아 이곳을 오르던 등반자가 추락사한 뒤 볼트를 설치했다.

크로니 백운산장서 확보물 만들고 초등  전문 산악인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인수봉  코스 80여 개 중 선호도 1위는 취나드B였다. 취나드A, 하늘, 동양이 그 뒤를 이었다. 5위는 크로니였다(월간 마운틴 2007년 8월 호). 크로니산악회는 69년 창립 이후 10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인수뿐 아니라 설악산 적벽에도 그들의 이름을 새겼다. 토왕성 빙폭 초등도 해냈다. 인수봉 크로니길 개척(70년) 작업 중 갖고 있던 확보물을 벙어리크랙(밋밋한 바위틈)에 끼울 수 없었다. 일단 후퇴한 뒤 백운산장에서 톱과 낫을 빌려 나무로 확보물을 만들고 초등에 성공했다.

검악  떠난 이를 위한 남은 이들의 오름짓  68년 여름. 숙명여대 4학년 백명순은 김정명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는 김정명이 소속한 검악산악회에 입회했다. 그러나 백명순은 백운대 바윗길에서 추락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백명순은 버릇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저곳에 길을 내면 어떨까요”라고. 69년 9월, 남은 이들은 떠난 이를 위해 인수봉에 열십자로 그어진 지점에 올랐다. 그러나 김정명은 중도에 포기했다. 아예 산을 떠난 것은 물론 한국 땅도 떠났다. 검악길은 1년 만에 완성됐다.  

의대  세월 흘러 산악인들이 붙여준 그 이름  이 길 이름은 의대(醫大)에서 나왔다. 서울대 의대다. 71년 여름, 의대생 6명이 인수봉 하단에 나타났다. 본과 4학년 이남규·오규철은 의사가 되기 전에 원 없이 멋지게 등반하기 위해 합류했다. 20여 일에 걸쳐 망원경으로 인수봉 곳곳의 등반 가능성을 확인하다 한 곳을 찾았다. 인수A로 올라 귀바위 뒤로 하강한 뒤 슬래브 등반에 나서 성공했다. 본격적인 개척에 나선 지 나흘 만에 마무리했다. 개척 보고서에는 길 이름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산악인들이 자연스럽게 ‘의대 길’이라는 이름을 달아줬다.

거룡  안전벨트 없이 P크랙을 넘어서다  인수봉 남면에서 전면 방향으로 넓은 밴드(band·띠처럼 길게 돌출된 부분)가 흘러간다. 용이 꿈틀거리고 지나간 듯하다고 해서 ‘거룡’이다. 72년 거리회의 장봉완·김제훈·전재운이 개척했다. 안전벨트 없이 몸에 매듭을 짓고 추락에 대비했다. 십자크랙 바로 우측 알파벳 P 모양을 한 크랙(P크랙)을 통과했다. 전재운은 76년 2월 설악산에서 ‘77 에베레스트 원정대’ 훈련 중 눈사태로 생을 마감했다. 로체샤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8000m를 돌파했던 최수남도 그곳에서 함께 잠들었다.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왔던 장봉완은 설악산까지 달려갔지만 늦었다. 한 줌 재로 변한 친구를 안방처럼 드나든 북한산 깔딱고개에 묻었다.

벗  허물 없는 친구끼리 만든 웃음 가득한 길  벗길은 산악회가 개척하지 않았다. ‘무소속’ 박용욱·장순욱이 길을 열었다. 73년, 스무 살의 두 청년은 후배 양남기와 함께 취나드 A와 취나드 B 사이에 짭짤한 길을 냈다. 벗끼리 어울리다 밤이 오는 줄도 모르고 만든 정감 어린 바윗길이다. 그 두 명은 군 제대 후 산을 떠났다.

아미동  아카데미 산악회 이동일!  이 고운 이름에 무슨 사연이 있을까. 크랙이 여자의 눈썹처럼 얇고 매끈해서인가. 하지만 의외로 간단한 답이 나온다. ‘아카데미 산악회 이동일’의 약자다. 이동일은 1973년 개척 당시 등반 대장이었다. 개척 작업이 한창일 때, 개척 대원이었던 이용민이 선인봉에서 등반 중 추락사한 아픈 사연이 있다. 그는 같이 등반하기로 한 후배가 약속 장소에 안 나타나 단독 등반 중이었다. 아미동 길에는 특이하게도 서면 벽으로 하강길이 따로 있다. 71년 11월 28일 기온 급강하와 강풍으로 7명이 조난사한 뒤 다른 하강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다.

빌라   최첨단 장비로 고난이도 루트 개척  서울고 출신들이 모인 마운틴빌라에서 72년 여름부터 만 2년 넘게 매달린 코스다. 71년 5월 이들은 도봉산 선인봉에서 미국 공군 조종사 T J 브루스를 구조했다. 브루스는 이들에게 혁신적인 장비를 선물했다. 당시 다른 산악회들은 마운틴빌라의 풍부한 장비를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 이들은 최신식 장비로 무장하고 경사 80도의 빤빤한 페이스(face·슬래브보다 경사가 심한 바위면)를 등반하면서 볼트를 설치했다. 이때 키가 1m90㎝가 넘는 개척자도 있어 볼트 거리가 상당히 먼 곳도 있다.

궁형  그들은 날랬다, 활시위 떠난 화살처럼…  76년 5월 23일과 일주일 뒤인 30일 이틀에 걸쳐 개척됐다. 동양산악회 서순만·이용대·정해욱·윤철상·이건범과 어센트산악회 김재근이 합동으로 길을 열었다. 인수봉의 마지막 남은 자연선을 따라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활처럼 휘었다 해서 이름이 궁형(弓形)이다. 당시 산악회 이름을 붙였던 흐름에서 과감히 벗어난다. 볼트는 한 개만 설치해 암벽 훼손을 최소화했다.

귀바위길  바위 천장의 푸르스름한 볼트 16개 고상돈이 에베레스트를 오른 77년 9월, 고악산악회의 최중광·김남준·이종호·유광호는 인수봉 귀바위에 길을 내고 있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선배들이 낸 길을 빼니 올라갈 만한 곳이 없어 인수봉 상단 한편에 버티고 있는 큼지막한 귀바위를 찾았다고 한다. 천장에 16개의 볼트를 박고 간이 사다리를 이용해 인공등반을 하는 곳이다. 6주에 걸쳐 개척됐다. 그리고 20년 넘게 방치됐다가 최근 볼트를 교체했다. 어스름에 인수야영장을 지난다면 이곳을 한번 보시라. 서쪽으로 숨는 해를 쫓고 있는 클라이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여명·산천지·건양·알핀로제스·여정 등 다양한 길들이 탄생했다. 인수봉의 공식 루트는 80개가 넘는다. 지면 사정상 모든 길을 소개하지 못했다.

추신: 바위에 입문하는 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린다. 인수봉 정상에 커피 자판기가 있다는 말에 혹하지 마시길.

뉴스 클립에 나온 내용은 조인스닷컴(www.joins.com)과 위키(wiki) 기반의 온라인 백과사전 ‘오픈토리’(www.opentory.com)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세요? e-메일 기다립니다. newscl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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