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새 시대에서도 옛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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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국회에선 옛날 영화가 재상영되고 있다.

저지조.의장실 봉쇄.몸을 숨긴 부의장.의장석의 몸싸움.수십개 법안의 번개통과.욕설과 고함.새우잠 철야농성…. 관객에게 익숙한 옛날의 장면들이 리메이크 (remake) 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어찌됐든 민주적 정통성을 지닌 국민의 정부 아래서도 의회민주주의가 저렇듯 또 다시 진흙탕을 구르니 허망하고 딱한 노릇이다.

다른 분야에선 나름대로 개혁바람이 부는데 국내정치에서만큼은 여야가 신발만 바꿔 신었지 하는 말, 하는 행동은 예전과 똑같다.

지켜보는 관객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온다.

애초 한나라당이 529호실 사태와 연계해 국회를 거부한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요 잘못된 전략이라고 우리는 누차 지적한 바 있다.

여당측은 야당이 국회를 뿌리치면서 물리력으로 의사를 방해하니 변칙처리가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있다.

이는 과거 정권의 여당이 펴던 논리와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다.

이런 강행논리는 바람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우선 529호실 사태에 있어 '안기부의 여당편향 문건' 등 여권의 귀책 (歸責) 도 상당하니 여당은 야당과 이 사태의 해결책을 협의할 책임이 있었다.

야당의 '몽니' 가 어느 정도 이유있는 것인 만큼 여당은 야당의 문제제기를 듣고 정보수집 업무의 법적 규정 같은 개선책을 제시했어야 하는 것이다.

529호실 사태는 정치적 요소가 더 많다.

정치는 정치로 풀어야 한다.

97년 말 여당의 노동법 처리사건에서 보듯 단독.변칙처리는 후유증이 적잖다.

교원노조 법안, 교육공무원법 개정안, 한.일어업협정 같이 사회적 갈등이 부딪치는 사안은 여야합의 속에 국회를 통과하는 것이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야당이 책임을 덜려고 여당의 단독처리를 방관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국회통과의 불완전한 모습은 여당에 부담이 될 것이다.

이는 강행통과를 대기하고 있는 경제청문회 국정조사계획에도 해당한다.

비리혐의로 체포동의가 국회에 와 있는 다른 의원들은 제쳐놓고 여당이 서상목 (徐相穆) 의원의 것만 강행처리하겠다는 것도 법의 형평에 맞지 않는다.

여당은 세풍 관련이 더 중대한 혐의라고 하나 정치권이 법을 자의적으로 판단할 권리는 없다. 여당의 단독 의사진행을 막으려 한 한나라당의 양태를 보면 어쩌면 당이 골치아픈 법안들에서 벗어나려고, 아니면 여당에 정치적 부담을 안기려고 통과를 방치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든다.

그들의 느슨한 행동을 보면 야당의 저지 열의가 부족했다는 인상이다.

만약 이런 고려가 있었다면 한나라당은 이도 저도 아닌 무책임한 정당이다.

여야는 옛날 영화를 종영시켜라. 경제청문회나 의원체포동의안 처리 같은 문제를 원만히 풀기 위해서라도 여야는 막후에서라도 대화를 터야 한다.

정치정보 수집의 한계를 법으로 명확히 하는 방안도 물론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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