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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신춘 중앙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소인국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순간 나는 아찔했다. 잠시 정신을 놓친 사이 의식 저편에서 어머니가 낡은 옷자락을 끌며 슬그머니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없단 말이에요! 항의조로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녀는 난감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는 들릴락말락하게 사과를 했다. 나는 한참만에 마음을 가다듬고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말아요. 뭐 일부러 그랬을까……. 대신 내 얘기를 들어주면 되잖아요. "

다시 나직한 소리로 말을 건네자 그녀는 되게 질린 표정으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종일 머물러 있던 아파트는 바람만 조금 불어도 휘우뚱한 게 금세 폭삭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소란스러웠고 나는 항상 소심하여 까치발로 조심조심 다녔다. 허름한 아파트는 매일 내 앞에서 붕괴되곤 했다. 굉음에 놀라 귀를 막고 있다 보면 무너진 건물이 휘어진 철골을 흉하게 드러냈고 어머니의 부얼부얼한 살덩이는 두부처럼 으깨어져서 시멘트더미 위에 허옇게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몸을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곧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고 있으면 아주 오랫동안 내 속에서 꿈틀거리던 구더기 같은 라면 가닥들이 죄 빠져버린 것처럼 후련해 키들키들 웃음이 났다.

뒤이어 찾아오는 맹렬한 식욕, 말하자면 여러 날을 굶은 짐승처럼 나는 몹시 허기가 져 흙 묻은 어머니의 살점이라도 허겁지겁 주워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상을 차릴 기쁨에 겨워 서둘러 삼층의 현관 앞에 이르러도 내가 바라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만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복어처럼 부풀어올랐던 내 위장만 다시 손톱만하게 오그라들 뿐이었다.

인기척이 나면 어머니는 리모컨으로 비디오를 꺼 버리고 미리 맞추어진 채널의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어머니는 울음을 삼키느라고 희미하게 느꺼워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기 한 달 전부터 자기만큼 뚱뚱한 여자가 나오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만큼 뚱뚱한 여자가 침대에 누워 죽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며 소리를 죽여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괜히 당신을 불렀어, 이젠 내가 너무 무겁단 말이야. 어머니는 회한에 찬 소리로 중얼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서럽게 울면서 만두를 삼켰다. 아버지가 죽은 지 꼭 십년째 되던 해부터 어머니는 처음 임신한 여자처럼 다정한 혼잣말을 하며 함부로 먹어 대더니 나중에는 급기야 운신하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어머니의 외롭고 큰 등에서는 흔들릴 때마다 무언가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아 나는 어머니의 곁에 바투 다가가지 못했다. 삶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추억을 울궈먹으며 산다고 누가 그랬다.

그 말대로 나는 오래 전의 고왔던 어머니를 추억하곤 했다. 어렵게 마련한 피아노 앞에서 서툴게 '고양이의 춤' 을 치던 어머니의 가늘고 긴 손가락과, 동해의 어디쯤에서 잘 가다듬은 소리로 들려주던 동요 '아침 바다' , 그리고 아파트를 마련하기 전까지 분주했던 어머니의 일주일들. 누가 감히 내 어머니의 영혼을 잠식한 것일까.

대상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자리에 누운 어머니를 보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고약한 이를 찾아내어 어머니의 영혼을 다 토해낼 때까지 패대기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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