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신춘중앙문예 단편소설]이혜진씨 당선소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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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쉰을 넘긴 보살은 신산한 삶의 여정을 거친 듯 몹시 피곤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상춘객들의 발길에 묶여버린 도로 위에서 그이는 슬몃 내 손을 잡으며 이랬다.

"도착하면 나하고 같이 갑시다. 거긴 비구만 있는 아주 작은 암자라 색시도 편히 쉴 수 있을 거유. 아주 조용한 곳이야. 오죽하면 서울서 예까지 내려오겠수?"

무슨 까닭이었을까. 웬만하면 내 손을 남에게 잘 주지 않는 편인데 그때는 예외였다. 보살의 거친 손으로부터 내게 저릿저릿한 무언가가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보살과의 인연을 뒤로 한 채 벚꽃 그늘이 한창인 긴긴 길을 따라 전령에게 간 저녁, 나는 다시 한번 타인의 전설이 내 손을 통해 들어오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놀라워라. 손을 잡은 잠깐 사이, 상대의 뭉개진 전설이 또렷하게 되살아나 슬프고 아프게, 또 환하고 따뜻하게 내게 전해지는 것이었다. 힘들었던 그간의 시간들이 다시 깨끗하게 치유되고 있었다.

나도 그런 손이 되고 싶다. 주변머리가 없어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걸 순 없지만 글을 통해서, 문자 사이사이 내 손을 수줍게 내밀어 그들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몹시도 모자란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리며 내 감성의 구할을 키워준 내 낡은 애인 (愛人) 들과 따뜻한 눈으로 지금껏 지켜봐주신 주위의 분들 모두,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쓴소리를 아끼지 않던 친구 혜진과 내 소중한 어머니와 영, 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같은 봄은 없겠지만 그래도 어서 봄이 왔으면 싶다. 벚꽃잎 분분한 아래에서 내 좋은 사람들과 작게 속살거리며 동동주를 마셔야겠다. 그때 술독으로 떨어지는 벚꽃잎 하나.

▶75년 충북제천 출생

▶98년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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