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내각제와 몽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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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JP는 참 어휘력이 풍부하다.

줄탁동기 (啄動機) 니 하는 어려운 한자말을 곧잘 쓰더니 지난주엔 '몽니' 라는 말을 써서 또 한번 화제가 됐다.

내각제개헌약속을 두고 "참을 때까지 참다가 안되면 몽니를 부린다" 는 것이다.

요즘처럼 신선한 발상도 격조있는 언어도 들을 수 없는 삭막한 정치권에서 잊혀져 가는 우리말 하나나마 듣는 것은 다행이라고 할까. 그러나 JP가 안되면 몽니를 부리겠다고 하는 내각제개헌문제를 생각하면 이 나라가 장차 어디로 갈지, 정치판이 어떻게 될지 막막한 생각부터 앞선다.

내년말까지 내각제개헌을 한다는 소위 DJP합의는 과연 지켜질 것인가.

지켜진다고 해도 큰일이고, 안 지켜진다고 해도 큰일이다.

어차피 내년은 이 문제로 한번은 큰일을 겪어야 할 것 같다.

만일 DJ가 내년 봄쯤 개헌약속을 지킨다고 선언한다고 치자. 그러면 DJ는 사실상 임기를 1년 정도 남겨둔 임기말 대통령이 된다.

임기말이 되면 으레 나타나는 레임덕 현상.권력누수 현상이 DJ라고 해서 안 올 수가 있을까. 대통령의 국정추진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정부.여당내에서도 대통령 눈치를 덜 보는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정치사건을 도맡고 있는 검찰 같은 기관이 불쑥 독자행보를 보일는지도 모른다.

경제위기는 끝나지 않았는데 위기극복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는 대통령이 이처럼 힘이 빠진다면 과연 지장이 없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내각제개헌전망이 확실해지면 2000년 4월의 국회의원총선거는 문자 그대로 정권쟁탈전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1년 내내 온나라가 선거전에 휩쓸릴 것이다.

만일 DJ가 약속을 안 지킨다고 치자. 그때는 그때대로 풍파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당장 JP가 몽니를 부리면 공동정권의 한 기둥이 무너질 수도 있다.

자민련 53명의원이 몽땅 하루만에 야당이 된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중 절반이라도 돌아선다면 애써 이룩한 여대 (與大) 는 무너지고 여소야대가 될 것이다.

야당의원을 다시 끌어들이고 다른 '우당 (友黨)' 을 만드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 과정의 정치적 부담과 혼란은 엄청날 것이다.

내각제에 따른 JP의 위상강화에 큰 기대를 걸어온 충청권의 민심동향도 걱정거리가 될 수 있다.

지금 영남권 민심만 해도 큰 골칫거리인데 여기에 충청권마저 돌아선다면 정부의 부담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DJ가 도대체 무슨 명분, 무슨 논리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온 세상이 주시하는 가운데 발표하고 선거공약으로 제시해 국민과도 약속한 DJP합의를 파기 또는 변경할 명분과 논리는 보통머리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DJ는 전에도 약속을 뒤집은 전력 (前歷) 이 있기 때문에 다시 그런 일을 되풀이하기엔 너무 부담이 크다.

이렇게 볼 때 내각제개헌약속은 지키기도 안 지키기도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이처럼 하기도 안하기도 어려운 개헌인데도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개헌을 안될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다수의 국회의원들은 물론 많은 보통사람들도 안된다고 거의 단정하는 경향이다.

정계에선 벌써 DJ - JP간의 재협상으로 '신 (新) DJP합의' 가 나올 가능성도 점치는 모양이다.

설마 DJ가 자기 입으로 약속을 깨지는 않더라도 상황이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의 추측인 것 같다.

예컨대 야당이 끝내 반대하거나 여당이 개헌에 필요한 3분의2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 내각제 반대 여론이 크게 일어날 경우 등 '개헌불능상황' 이 조성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누구도 몽니를 부림이 없이 문제를 순탄하고 원만하게 넘기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다.

가장 겁나는 것은 각 정파간에 타협이 되지 않고 각자가 세 (勢) 대결로 각개약진하는 경우다.

그래서 가령 개헌찬반이 지역대결로 나타나고, 사쿠라와 철새가 대량생산되고, 원칙도 명분도 없는 이합집산 (離合集散) 이 벌어지고, 여기에 개헌찬반의 대중조작까지 벌어진다면… 끔찍한 일이다.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직 상상에 속하는 것이지만 내각제문제를 잘못 다룰 경우 정국혼란.국정혼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몽니라는 말은 JP가 했지만 몽니가 JP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야당도, 여러 중간보스도 몽니를 부릴 수 있다.

정치인들이 권력 때문에 애국심과 도덕성을 잃고 패싸움이나 거짓말을 하고 국가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면 국민도 '몽니' 를 부릴 수밖에 없다.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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