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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살림꾼’ 효재가 만난 사람 ② 문용린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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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재씨의 남편 임동창씨의 음악을 좋아하는 문용린 교수는 자주 연주회를 찾았고 자연스레 효재와 인연도 맺게 됐다고 한다.

“깊은 인연으로 내 손에 들어온 물건, 새 것에 눈 간다고 쉽게 내다버릴 수 있나요. 살 때보다 버릴 때 한번 더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씨와 여성잡지 프리미엄 여성중앙이 ‘명사와 함께-효재의 지구를 살리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이효재씨가 명사를 초대해 일상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환경 운동 방법과 친환경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다. 두 번째 손님은 전 교육부 장관이자 현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인 문용린씨다.

3년 전, 성당에서 치러진 딸의 결혼식에서 문 교수는 하객들에게 백설기와 녹차설기를 선물하려고 마음먹었다. 이때 이효재씨는 버리고 마는 포장지 대신 색실로 한 땀 한 땀 꽃을 수놓은 고운 행주로 떡을 싸도록 도왔다.

“아직도 제 딸은 그때의 포장 행주를 얘기해요. 종이 타월이나 물휴지를 많이 쓰는 요즘 같은 때, 선물로 받은 광목 행주를 부엌 한편에 두고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죠.”

문용린 교수는 옛것 예찬론자다. 한번 손에 들어온 익숙해진 것들은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잘 바꾸지 않는 것이 그의 오래된 철칙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면 으레 가질 법한 습관이죠. 어려서부터 늘 ‘아껴야 한다’고 배웠으니까요. 깊은 인연으로 내 손에 들어온 물건들인데 새로운 것에 눈 간다고 쉽게 내다버릴 수 있나요. 내 손에서 떠나면 용도를 잃고 폐기 처분될 게 뻔한데.”

언제나 그의 재킷 주머니 한구석을 차지하는 만년필은 올해로 서른 살이 됐다. 허리춤의 벨트 역시 끝이 해어진 지 오래지만 아직도 문 교수에겐 단 하나뿐인 벨트다.

“옛날 어른들은 쓰고 난 하수를 버릴 때도 더운 물은 식혀서 버렸죠. 뜨거운 물을 그냥 버리면 흙 속의 미생물이 죽어서 자연을 해칠 수 있으니까요. 이처럼 뭔가를 살 때보다 버릴 때 고민을 한 번씩 더 했으면 좋겠어요.”

평범한 밀짚모자이지만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플라스틱 진주 목걸이를 하나씩 바늘로 꿰매 장식하니 나들이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뭐든 아끼는 독일사람들에 놀라”
문 교수가 ‘잘 버리는 일’에 충격을 받은 것은 지난해 독일 도르트문트시에 갔을 때였다. 독일은 음식점에서도 생수를 무료로 제공하지 않는다. ‘물 값’을 따로 받는다는 걸 몰랐던 문 교수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생수 3병을 시켜 먹었다. 그런데 함께 식사한 독일 친구는 생수 한 병을 몇 차례에 걸쳐 나눠 먹는 것 아닌가.

“독일에선 물도 돈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물 한 병으로 식사 후 입을 가실 때까지 양을 계산해서 나눠 먹는 게 자연스럽게 몸에 밴 거죠.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무조건 또 사고, 남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리 버리는 것이 없도록 계획적으로 생활하는 모습에 가슴이 쿵 울리더군요.”

흩어진 짚을 모아 빗자루로 사용하다가 빳빳한 뒤쪽을 잘라 색실로 묶었다. 깨 통에 남은 찌꺼기를 덜어내는 데 유용한 깨빗자루다.(위) 욕실용 슬리퍼에 레이스를 달고 한복 자투리 천으로 ‘곱창 꽃’을 만들어 붙였다. (아래)

문용린 교수가 ‘오래 쓰기’의 일인자라면, 이효재씨는 알려진 대로 헌것을 새것으로 ‘고쳐 쓰는’ 미다스의 손을 가졌다. 얼핏 문 교수와는 방법이 달라 보이지만 이효재씨의 ‘고쳐 쓰기’ 습관도 결국 익숙한 것을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촌스러운 디자인의 욕실 슬리퍼에 레이스와 꽃을 달고, 자투리 실을 모아 뜨개질한 컵 받침에는 먹다 남긴 와인 물을 들이고, 못 입는 스웨터는 팔 부분만 잘라 목도리로 사용하는 그녀의 솜씨는 늘 문 교수를 감동시킨다.

이효재씨도 문 교수의 철학에 존경을 표한다.

“문 교수님은 제가 생각을 더 넓게 확장하는 데 영향을 준 분이죠. 30년 경력의 교육학자답게 늘 다음 세대를 생각하거든요. 친환경도 우리 세대의 실천으로만 끝날 게 아니라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으로 연결시킬 수 있도록 방법들을 고민하죠.”

문용린 교수가 제안하는 친환경 교육은 ‘말’로만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다.

“젊은 세대에게 무조건 쓰지 말고 아끼라고만 하면 어디 듣겠습니까. 필요한 것은 사서 써야죠. 대신 한번 산 것을 오래 쓰라고 가르쳐야죠. 사람이 귀하듯 물건도 귀한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려면 우선 어른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틀과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죠.”

“재활용 동참 이끌 시스템도 필요”
독일의 길거리에선 버려진 페트병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식당·백화점·마트 등 큰 건물 앞에 페트병 수거기가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빈 페트병을 집어넣으면 돈이 나오는 기계다. “국가 차원에서 ‘빈 페트병은 돈이고, 따로 수거해야 한다’는 인식을 국민이 가질 수 있도록 시스템화한 것이죠. 우리도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자’ 정도의 의식 교육만으로는 부족해요.”

문 교수는 평소 ‘세대의 숙제(Generation Mission)’라는 말을 자주 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앞 세대가 뒤 세대에게 숙제를 만들어주는 것을 말한다.

“가령 초등학교 4학년은 주변의 다 쓴 배터리를 모으는 학년, 5학년은 페트병을 모으는 학년 등 환경을 위해 스스로 동참할 수 있도록 실천과제를 제시해 주자는 거죠.”

지구를 살리는 일은 특정 세대, 특정 시기에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앞 세대가 자연스럽게 뒤 세대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일. 이것이 문용린 교수의 ‘지속가능한 지구 만들기’의 청사진이다.

글=강민경 프리미엄 여성중앙 기자
사진=문덕관 studio lamp


커다란 연잎 안에 녹차를 담고 바가지로 떠먹을 수 있도록 했다. 녹차 빛깔이 황금빛을 띄는 것이 보기 좋다.

연잎에 담아낸 녹차, 와인으로 물들인 찻잔 받침…
이날 이효재씨는 문용린 교수에게 비빔국수를 대접했다. 저녁때를 앞둔 다섯 시쯤이라 출출하기도 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국수”라며 문 교수는 한 그릇을 가볍게 비웠다. “나는 하루 세 끼를 국수만 먹으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아요. 하하.” 마당 장독 항아리에서 퍼낸 고추장으로 맛깔스럽게 비빈 국수는 매웠다. “여름철에는 매운맛이 식욕을 돋우고 입안을 개운하게 하죠.” 이효재씨는 입안의 매운 기를 달랠 수 있도록 커다란 연잎에 진한 녹차를 담아냈다. “녹차가 연녹색 이파리와 어울리니 황금빛을 띠는군요.” 문 교수는 이 색다른 상차림을 아이처럼 신기해했다.

처음 찻잔을 받쳐 내왔을 때만 해도 색실로 짠 평범한 손뜨개 받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색깔의 진하기가 조금씩 달랐다. 천연염색을 한 것이다. 그것도 손님들이 먹다 남기고 간 와인으로 물들인 것이다. “남은 와인이 아까워 어찌할까 고민하다 하얀 색 받침에 와인 얼룩이 진 것을 보고 아예 자줏빛을 만들자 생각했죠.” 하룻밤 와인 잔에 담갔다 아침 햇볕에 널어 말리면 모든 과정은 끝난다. “이렇게 천연염색을 하면 시간이 갈수록 색이 바라면서 또 다른 멋을 내죠. 그것이 싫으면 또 한번 담그면 돼요.” 오른쪽의 검정색은 서리태 삶은 물을 이용한 것이다.


여름 햇볕보다 무서운 게 가을볕이라는 말이 있다. 한여름부터 가을까지 양산 하나 장만해 두면 얼굴이 검게 그을리는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사진 속 우산은 처음에는 밋밋했다. 하지만 촘촘히 레이스를 뜨고 하트 장식까지 다니까 이렇게 사랑스럽게 변신했다. 이처럼 이효재씨에게는 헌것을 고쳐 쓰고, 평범했던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하나 가져가면 안 되겠느냐”며 만드는 방법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이효재씨는 재활용품 꾸미기 아이디어들을 모아 『효재처럼 손으로』라는 책을 만들었다. 9월 출판 예정이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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