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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터뷰] 이만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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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중국 정부의 고구려사 왜곡이 유난히 무더운 올 여름을 달구는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런 가운데 친일 및 의문사 진상규명 등 과거사 청산이 시민사회의 현안으로 부각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도 정치권의 새로운 정쟁거리가 되고 있다. 역사 왜곡, 과거사 청산, 정체성 등을 둘러싼 논란은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광복절을 앞두고 원로 역사학자인 이만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당면한 문제를 헤쳐나갈 방도를 물었다. [편집자]

-고구려사 왜곡을 위한 중국의 '동북공정'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동북공정은 단순히 고구려사 왜곡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55개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중국의 고민에서 불거진 문제라는 점을 파악해야 합니다. 또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패권 경쟁의 맥락, 6자회담 관련 여부도 검토돼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동북아시아 지역의 정치경제적 지형이 새롭게 정립되도록 요구받는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역사적 접근 외에 국제정치적 관점도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역사인식 문제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동북공정은 우리에게 심각한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주변 환경의 변화가 한반도 주변 지역을 '역사 분쟁 지역화'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인식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고민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로 되면 우리 역사인식의 체계성이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게 됩니다. 고조선,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 통일신라와 발해,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인식이 뒤틀리게 될 때 역사적 공허감은 물론 한국인의 자기정체성도 매우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역사학계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대응 전략은 무엇입니까.

"역사학에 국한해 말하면 '고구려사=한국사'라는 1980년대 이전의 인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학문적으로 보면 중국의 주장에 허점이 많습니다마는, 현실적으로 중국을 설득하는 건 길고도 어려운 과정이 될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명백히 패권주의 성격을 지닙니다. 사회주의가 가장 비판하는 것이 패권주의와 제국주의입니다. 이 같은 역사 패권주의는 정치경제적 패권을 향한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이런 모습은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그들에게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현실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동북아시아의 공존과 평화를 위해 '역사 주권'과 '영토 주권'을 엄격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구려사의 전개 지역이 현재 중국땅이라 해서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도 역사주권과 영토주권을 의도적으로 혼돈한 몰상식한 짓입니다. 반대로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도 이 지역의 역사주권 회복을 어렵게 합니다. 이런 주장으로는 세계적 동의를 얻기 힘들 뿐 아니라 중국의 패권주의 전략에 말려들 우려마저 있습니다."

-일제시대 친일진상 규명 등 과거사 청산 문제가 정치적 현안이 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굴절된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데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친일 규명의 경우 친일을 한 개인.기관.단체에 대한 법적.신체적 규제는 이미 불가능해졌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아픔이지만 역사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국민적 공감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번 친일 진상규명 문제는 시민단체에 의해 주도됐지만 국회에서의 입법과정에서 그 공감대가 마련됐다고 봅니다. 누굴 탓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회개를 통해 털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소모적 논쟁은 극복되고 화해와 용서가 새로운 민족적 에너지로 승화될 것입니다. 국민화합의 기회로 만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탈민족.탈국가 주의의 관점에서 이 같은 과거사 청산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일부 경제사학자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계량적 방법으로 증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또 탈민족.탈국가 시대에 친일 여부를 따지는 게 고리타분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사적 보편가치를 배제한 채 이런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주의나 제국주의가 보편적 가치를 상승시키는 데 기여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식민주의나 제국주의가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고 세계사를 부끄럽게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까."

-이 같은 과거사 청산 작업이 사회적 갈등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과거 존경받는 목사 한 분이 세계적으로 저명한 상을 받고 나서 '나는 신사참배를 했기 때문에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그를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더욱 존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에 관련자의 후손이나 관계자, 기관들이 과거사를 진솔하게 털어놓고 겸손히 공동체의 처분을 기다리겠다고 한다면 누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지겠습니까. 진솔한 고백은 화해와 용서를 가져오게 돼 있습니다. 남아공의 만델라가 집권 후 흑백갈등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극복한 것은 좋은 모델일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조심스럽습니다만,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 과거사 진상규명 논의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유감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논쟁의 와중에서 자칫 진상규명의 대상인 '그 과거'가 정체성과 뒤섞일 위험은 없는지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정체성으로 부각하려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앞서 지난 시절 일제 식민지, 군부 독재, 반민주, 탈인권적인 과거사도 남겨놓았습니다. 역사에서 정체성은 이상과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변화돼 갑니다. 역사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인권이나 민주 등 보편적 가치와 이상이 공동체를 통해 실현됐을 때 그 실체를 정체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의식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점입니다. 우리 역사교육의 문제점도 검토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북공정은 과거 일본의 교과서 왜곡처럼 역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세계화.동북아 시대의 새로운 전개를 앞두고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립할 것이냐 하는 것은 당면한 고민거리입니다. 이제는 과거처럼 영토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가 아니라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는 문화적 공동체의 확대가 필요합니다. 국사는 국어 못지않게 정체성 고양에 필요 불가결한 교과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국사는 기초필수 과목이 아니라 여러 교과목 중 하나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동북공정에 대한 여론이 비등해지며 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들끓는데 실제로는 반영되지 않습니다. 국사교육 강화를 주장하면 과목 이기주의로 눈총받게 될 뿐이니 안타깝지요."

-이번에 우리 정부가 중국에 항의했지만 성과 없이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정부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유럽은 나치 이후 역사분쟁을 없애기 위해 공동 교과서를 만들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중.일은 물론 베트남.대만 등을 포함한 동북아의 역사교과서를 공동으로 개발.교육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일본과 중국이 쉽게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것은 중국에 역사왜곡을 항의하는 것 못지않게 외교적 역량을 경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현 시점에서 중국이 왜곡된 주장을 시정하지 않는다면 세계를 상대로 우리의 주장을 넓혀 공유해 가는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 이만열 위원장은 …

이만열 위원장의 모습에선 온화한 풍모와 엄격한 절제라는 두가지 분위기가 공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지적 활동도 민족주의와 세계보편가치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위원장 스스로 자신을 '열린 민족주의자'로 규정한 것도 민족주의와 세계보편가치를 모두 중시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위원장은 신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서울대 문리대 국사학과에 입학, 역사학과 인연을 맺었다. 단재 신채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단재를 통해 민족주의를 가다듬었다. 인권과 평화 등 세계보편가치에 대한 인식은 기독교 연구를 통해 단련되었다. 1980년 숙명여대 교수에서 해직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던 그가 주로 천착한 것도 바로 한국기독교사 연구였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설립에 이어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희년의료공제회 등을 설립,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제하에 받았던 고통이 민족적 차별에 의한 것이라면, 요즘 외국인 노동자들을 핍박하는 것도 결국 같은 만행이라는 '열린 민족주의'에 따른 실천적 행동인 셈이다. 그는 10여년간 기독교계 통일운동 단체인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회를 이끌며 20여명의 박사급 학자와 함께 독일.베트남.중국 등을 현장 답사하며 110회 이상의 세미나를 열정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약력 ▶1938년 경남 함안 ▶서울대 국사학과 ▶숙명여대 교수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객원교수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회장 ▶한일역사연구촉진공동위원회 위원 ▶한국사학사학회 회장 ▶제8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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