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적이 아니라 한 팀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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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박지성이 소속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단이 연습하는 모습을 TV로 본 적이 있다. 그들은 편을 갈라 각기 다른 색의 조끼를 입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팀이지만 연습 때는 서로 다른 편이 된다. 그들이 편을 갈라 싸우는 이유는 실전에서 다른 팀과 싸우기 위한 기량을 기르기 위해서다. 우리 노조도 이렇게 할 수는 없을까? 회사의 역량을 최고 상태로 만들기 위해 노조가 있는 것 아닌가? 회사는 이윤을 많이 내 임금을 최적의 수준으로 주고, 종업원은 최선의 노동과 기술을 투입해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 낸다. 그런 회사라야 국내든 국제든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사측이나 노측은 조끼만 다른 색으로 입고 같은 팀으로서 자체 기량을 높이는 노사협의를 할 수 없느냐는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여나 야나, 좌나 우나 결국은 나라 전체의 역량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 같은 사생결단식의 싸움은 피할 수 있다. 우리 정치는 동료 간의 경쟁이 아니라 적과의 싸움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방 공간에서 충만했던 ‘우리’라는 감정이 왜 그리도 빠르게 메말라 버렸을까? 불행히도 우리가 곧 이념 대립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이념 대립은 우리에게 ‘동료’라는 생각을 버리게 만들고 ‘적’이라는 생각을 부추기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좌우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좌나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는 인간답게 살자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나 좌라는 이념이 권력을 추구하게 되면서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행동의 원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에 결국은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좌파도 그런 적대감을 정치적 힘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나라가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우파의 책임도 컸다. 그런 적대감을 만들어 내는 원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배가 고파 빵 한 조각 훔친 사람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다루면서 스스로는 제도가 만들어 주는 특혜와 안락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공정치 못한 기득권이 결국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점은 눈감았다.

우리 사회의 적대감은 이미 너무 깊어졌다. 이런 풍토에서는 어떤 정책도 뿌리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적대감 속에서 정치개혁에 대한 합의가 나올 수 없다. 양극화에 대한 걱정도 많다. 아랫목이 먼저 더워져야 윗목에도 온기가 퍼진다고 하지만 구들이 막혀 있다면 소용 없는 일이다. 그러니 경제가 좋아진다는데도 도시빈민은 더 늘어만 간다. 이런 단절된 사회는 적대감만 더 높아진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동료의식이다. 우리 팀이 잘돼야 나도 잘된다는 공동 운명체 의식 말이다. 우선은 이제부터라도 자녀들의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 있는 자, 없는 자를 가르는 의식교육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한 팀이라는 공동체 교육을 시켜야 한다. 수재들은 거침없이 뛰어 앞서게 만들고, 뒤처진 자들은 보살펴서 끌어올리는 그런 교육이 되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적대감을 부추기는 정치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적대감을 부추기는 이유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다. 어떤 정치인이든 적대감을 선동하는 사람을 경계하자.

동료의식은 공정한 대접에서 시작된다. 공정한 기회가 같이 주어져야 한다. 우수한 선수는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그 선발이 투명해야 동료의식이 생겨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의 공정성·투명성과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일은 정치에만 맡긴다고 해결될 수 없다. 정책이나 제도 개선만으로도 안 된다. 우리의 태도·의식·가치관과 연관된 일이기 때문에 교육계는 물론 종교계와 문화계도 협조해야 한다. 우리는 64년 전 ‘우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날의 감격과 일체감이 작게는 내 직장에서 출발하여 크게는 나라 전체로, 더 나아가 북쪽으로까지 확대되기를 소망한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