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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미당·황순원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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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시-송재학 ‘모래葬’ 외 23편
유연한 감각 뒤엔, 혹독한 창작의 반복

사막의 모래 파도는 연필 스케치풍이다 모래 파도는 자주 정지하여 제 흐느낌의 像(상)을 바라본다 모래 파도는 빗살무늬 종종 걸음으로 죽은 낙타를 매장한다 모래葬을 견디지 못하여 모래가 토해낸 주검은 모래 파도와 함께 떠다닌다 모래 파도는 음악은 아니지만 한 옥타브의 음역 전체를 빌려 사막의 목관을 채운다 바람은 귀가 없고 바람 소리 또한 귀없이 들어야 한다 어떤 바람은 더 많은 바람이 필요하다 모래가 건조시키는 포르말린 뼈들은 작은 櫓(노)처럼 길고 넙적하다 그 뼈들은 모래 속에서도 반음 높이 노를 저어 갔다 뼈들이 닿으려는 곳은 모래나 사람이 무릎으로 닿으려는 곳이다 고요조차 움직이지 못하면 뼈와 櫓는 증발한다 물기 없는 뼈들은 기화되면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너무 가벼워 사라지는 뼈들은,

-‘문학과 사회’ 2008년 가을호

크고 작은 사구(沙丘)로 뒤덮인 광막한 사막의 풍경에서 바다를 떠올린 적은 없으신지. 모래바다는 그러나 ‘물 바다’와 속성이 정반대다. 바다가 생명의 시원이라면 사막은 불모를 상징한다.

송재학(사진) 시인의 ‘모래장’은 느린 속도로 그러나 철저하게 ‘사막의 배’ 낙타가 죽어 소멸하는 과정을 옥타브, 목관(木管), 목관을 채우는 바람 등 음악적인 이미지를 동원해 요약한다. 송씨는 “단순히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성이 완전히 소멸돼야 죽음이 완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들은 송씨의 올해 ‘소출’에 대해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들이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적 긴장을 유지하는 방법론이 궁금할 정도”라는 것. 송씨는 “재주가 없다 보니 누구보다 열심히 쓰는 편”이라고 밝혔다. 혹독한 창작의 반복을 통해 시적 감각을 말랑말랑하게 유지하면 어떤 대상도 자신있게 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래의 지구전은 힘이 세다.

글=신준봉, 사진=프리랜서 공정식

◆송재학=1955년 경북 영천 출생. 86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진흙 얼굴』『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소설-김중혁 ‘C1+y=:[8]:’
엉뚱한 상상이 삐딱한 문장을 만나다

“지구가 멸망해도 바퀴벌레는 살아남는다면, 바퀴 달린 것 중에는 반드시 스케이트보드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김중혁(사진)씨의 단편 ‘C1+y=:[8]:’(‘문학과사회’ 2009년 여름호)은 억지 같은 조건문으로 시작한다. 바퀴벌레 특유의 생명력을 언급한 ‘조건절’과 스케이트보드의 보존을 주장하는 ‘주절’은 ‘바퀴’라는 단어가 공통될 뿐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첫 문장부터 삐딱하더니, 엉뚱한 상상과 사건의 연속이다. ‘빗살무늬호랑이’ ‘벽돌총새’ 등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로 가득찬 정글을 찾은 도시학 연구자인 ‘나’. 언덕에서 미끄러져 생명이 위태로울 뻔 했지만 원숭이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점입가경인 것이 나를 구해준 원숭이, 웃으면서 빤히 쳐다본다. 정글행을 후회하는 나, 여행 떠나기 전에 누군가 “정글은 하나뿐인 목숨을 내놓고 가야 하는 진하디 진한 삶의 체험 현장이며 편리함과는 무관한 곳인데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어야 한다고 너스레 떤다.

내 과제는 정글의 비밀스런 구조를 밝혀 내 도시개발 계획에 활용하는 것이다. 내게 바람직한 도시는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힌, 얼핏 정글같은 곳이다. 나는 그런 도시의 존재 가능성을 정글의 원숭이처럼 자유로운 존재, 스케이트보더들에서 찾는다.

소설은 규격화된 도시의 삶을 비판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하지만 김씨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문장들을 차례로 이어 붙일 뿐 미리 정한 주제나 플롯조차 없이 쓴다는 것이다. 김씨는 오히려 “소설은 그저 스케이트보드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수학방정식처럼 보이는 제목도 ‘시티(City) 스케이트’(:[]:는 위에서 내려다 본 스케이트 보드 판자와 네 바퀴, 8은 스케이트보더의 두 발)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항변’에도 불구하고 예심위원들은 ‘시티 스케이트’는 “21세기 도시적 감수성과 관련 깊다”고 평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정진보 대학생 사진기자(후원: Canon)

◆김중혁=1971년 경북 김천 출생.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펭귄뉴스』『악기들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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