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코끼리를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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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찾아서
조경란, 문학과지성사, 305쪽, 8500원

<본문 203~204>

그렇게 10여 년을 우리 가족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는 옥상 위, 커다란 항아리 안에 들어 있다. 김장 김치를 묻듯 항아리 안에 비닐을 한 겹 씌워 편지들을 넣곤 밀봉했다. 아버지가 한 일이다. 그 항아리를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훗날 아버지가 돌아가고 난 뒤엔 그 편지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벌써부터 나는 걱정이다. 날마다 집을 갚고 날마다 집을 잃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 아직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아침이면 아버지는 계단에 떨어진 조간 신문을 챙겨오고 엄마는 구두를 닦고 자매들은 출근한다. 게발선인장 꽃이 피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내가 듣지 않는 데서 서운해하고 엄마는 우리들에게 눈치를 준다. 엄마는 내 옥탑방에 올라오지 않는다. 전화가 걸려오면 수화기를 방문 앞에 내려놓고 도로 계단을 내려간다. 관절을 앓는 엄마가 언제까지 저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을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도 나는 자주 아래층에 내려간다. 자매들 중 누군가 빨리 결혼하여 이 집을 떠나주었으면 좋겠다. 방이 비면 안방에 있던 짐들도 그리로 옮기고 마루에 소파도 놓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는 자매들 중 내가 가장 마지막까지 이 집에 남아 있을까 봐 두렵기도 하다. 아버지는 여전히 옥탑방이 무너질까 가슴을 떨고 나는 딸들의 짐들과 책들로 잠식당한 안방이 걱정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아니지만 가장 불행한 사람도 아니다. 마음 상한 일이 있거나 자존심이 상할 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식탁에 앉아 멸치를 다듬는다. 멸치가 없으면 땅콩 껍질이라도 깐다. 가끔은 이쁜 옷을 차려입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파스타를 먹고 와인을 마시기도 한다. 엄마는 지금도 사람은 부족한 대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아직 이 집에 살고 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불행했던 순간이 남아 있는 집이다. 옥탑방은 따뜻하다. 지금은 겨울이니까. 아래층 식탁에 숟가락 올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밥 먹자! 엄마가 내 방을 향해 크게 소리친다. 나는 얼른 넷, 대답하곤 쿵쾅쿵쾅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그가 전화를 해주었으면, 하고 기다릴 때가 있다. 나의 코끼리 이야기를 이해해주고 귀 기울이는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까.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코끼리 얘기만 갖고도 한 시간쯤은 수다를 떨 수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래도 보이는 게 있다. 이따금씩 집이 꿈틀, 움직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아, 코끼리가 왔구나, 짐짓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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