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로길 할머니(右)가 자신을 돌봐주는 최선옥 수녀와 포즈를 취했다. [선양=연합뉴스]
29년 17세 때 안 의사의 사촌 동생 홍근씨의 3남 무생씨와 결혼한 안씨는 일제 탄압으로 남편이 숨지자 독립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차(車)씨였던 성을 안씨로 바꾸고 안 의사의 독립운동 활약상을 적극 알렸다. 태극기를 만들어 집에 걸어놓고 독립군을 상징하는 군복에 별을 새긴 모자를 쓰고 다니며 “대한독립”을 외쳤다.
이적 행위 단속과 종교 탄압이 거세게 몰아치던 58년 1월, 안씨는 하얼빈역 광장과 하얼빈 다오리(道理)구 공안분국 앞에서 태극기와 안 의사 초상화를 앞세우고 안 의사의 공적 인정과 종교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안씨는 공안에 체포돼 반혁명죄로 무기형을 선고 받아 옥에 갇혔다.
감옥에서도 안씨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치마로 태극기를 만들어 벽에 걸어놓고 안 의사를 추모했으며 독립군복과 모자를 고집했다. 개조가 불가능한 불순분자로 낙인 찍힌 안씨는 72년 네이멍구(內蒙古)의 오지 전라이 노동교화 감옥농장에 넘겨져 6년간 강제노역을 했다. 중국 정부는 그 후에도 안씨를 보호관찰대상으로 지정해 감옥농장에 억류해 노역을 시키다가 98년에야 풀어줬다. 오갈 데 없는 안씨의 딱한 사연을 들은 최선옥(72·전 서울 송모자애병원 원장) 수녀의 도움으로 그는 거처를 구하게 됐다.
강제 노역한 전라이 감옥농장이 생활보조금 명목으로 매달 200위안(약 3만7000원)이 유일한 수입이다. 북·중 협정에 따라 재중동포에게 중국 국적을 부여했으나 안씨는 자신의 주민등록에 올리는 이름으로 천주교 세례명을 고집했다. 결국 중국 당국은 ‘안누시아’로 불리던 그의 세례명을 중국어로 음역해 ‘안로길’이라는 이름으로 등록했다.
안 의사의 친인척은 한국 정부의 관심을 기대하고 있다. 안씨를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선양=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