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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북한탐험]15.개성을 떠나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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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어디서 사는 것도 노래가 되지만 어디로 가는 것도 노래가 된다.

경기민요 개성난봉가 1절은 이렇다.

'박연폭포 흐르고 흐르는 물은/범사정으로 감돌아 든다/에 에헤야 에헤/에루화 좋구 좋다/이러럼마 둥둥 내사랑아' . 난봉가란 사랑의 노래다.

높낮이가 반복되는 개성의 사랑노래 가락은 쾌활하기 그지없다.

그런 쾌활함으로 박연폭포의 힘찬 물을 그려내고 있는지 모른다.

개성시내 민속촌은 옛 것은 아닐지라도 그 단층기와집 구역에 이런 난봉가가 들리기를 바랐다.

50년대 서울 안국동.소격동의 기와집들을 소재로 그린 동양화가 안상철 (安相喆) 의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 '잔설' 이 계절과 상관없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곳 건물들이 세워진 것은 그다지 오래가 아니었다.

조선조 반가 (班家) 의 구조인데도 금시발복 (今時發福) 의 동네 같았다.

개울의 물길은 느렸고 그 양쪽으로 서로 의좋게 마주 바라보는 일각대문들이 이어지는데 무척 한적했다.

그런 집 중의 하나에 안내됐다.

"이 집이 '통일의 꽃' 임수경이 숙박한 곳입네다" 라고 해설원이 허두를 뗀다.

지난 날 임양이 북한의 판문점 통일축전에 참가했을 때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런 손님이야 무료제공이겠지만 누가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가려면 서울의 특급호텔 특실 값에 버금가는 숙박료를 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무료라도 거기서 잘 생각이 없었다.

집안은 사람 기운이 전혀 없어 코가 맹맹해졌다.

무슨 행사가 있을 때나 누가 와서 잔다 하더라도 퀴퀴한 냄새만이 임자노릇을 할 것이다.

병풍과 문갑.방석이 있고 벽의 한군데는 그림 한두 폭도 싱겁게 걸려 있다.

한마디로 영화촬영을 위한 세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여기서 영화도 찍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었다.

'림꺽정' 도, 다른 사극도 찍었다 한다.

그 곳에서 부랴부랴 떠났다.

그 곳보다 거리가 훨씬 사람에게 자연스러웠다.

한참 가다가 남대문에 이르렀다.

여기도 사람이 북새통을 이루는 일이 없이 한산했다.

자전거를 탄 허술한 아저씨가 지나갔다.

순한 개도 있었다.

공중은 펑 뚫린 듯이 시원했고 사람들은 욕망으로부터 오래 동떨어진 자족 (自足) 과 체념으로 그 얼굴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일단 민족에 대한 이념적 관심이라면 갑자기 뜨거운 얼굴로 바뀐 다.

타율의 끝에 자율이 있었다.

'통일' 이라는 말은 기계적이다시피 튀어나온다.

그래야 하겠지. 통일이 되지 않고 있으니 통일이라는 말이나마 입에 담고 있어야 하겠지. 특히 개성은 통일에 관한 한, 그 당위가 감정으로 덩어리져 있다.

6.25 전에는 이남이었다가 휴전 이후에는 이북이 된 곳이다.

이 과정에서 개성사람들의 희생과 시련의 이산은 어느 지역보다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통일에의 원초적 집념이 있어야 했다.

더구나 개성은 북한 쪽에서는 휴전선 이남에 총과 총으로 맞서 있는 분단의 최전방이 아닌가.

개성의 북안동 남대문의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라 했다.

품격이 그만이었다.

그 문루는 무지개문인데 정면 3간, 측면 2간의 중층팔작 형식이다.

1346년 주조의 연복사 종이 거기 걸려있다.

그 종소리는 예성강 강물이 바다 깊숙이 퍼져가는 바다 안개 속까지도 은은히 들릴 만큼 그 울림이 길고 아름답다 한다.

경주 에밀레종, 오대산 상원사 종들과 함께 한반도 5대 명종 (名鐘) 의 하나라 한다.

1563년 조선 명종 때 개성시내의 자랑거리인 연복사가 화재로 잿더미가 되자 그 곳의 종을 아예 남대문 문루에 옮겨다 걸어놓은 것이다.

이 남대문은 고려 후기 공양왕 초기에 최영의 제의로 축조된 내성 (內城) 과 함께 세워진 것인데 1950년 6.25때 폭격당한 것을 5년 뒤 복구해 오늘에 이르렀다.

실로 기구한 것이 남대문이고 남대문에 걸린 종이었다.

1954년이라면 한반도 남북의 어디인들 폐허가 아닌 곳이 없었다.

더구나 개성은 몇 번이나 격전지였고 공중폭격의 집중적인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폐허의 남대문을 재빨리 복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벌써 44년이나 지났으니 어지간히 고색 (古色) 도 감돌고 있는 셈이다.

그 곳 연복사 종도 한 미인의 불행처럼 사연이 있다.

조선 중기의 석학 채수 (蔡壽) 의 '송도기행' 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연복사 다락에 올라 도성을 바라보았다.

서쪽에 큰 비석이 있는데 권근이 글을 짓고 성석린이 글을 썼으며 동쪽에는 큰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곡이 명 (銘) 을 썼다. '

연복사는 고려 후기의 난세를 이겨내기 위한 안간힘의 비보사찰이었다.

그 뿐 아니라 그 곳 5층누각은 송도 시내를 의젓이 내려다볼 수 있는 장중한 것이었다.

고대 중국의 북위 수도 낙양의 영녕사 (永寧寺) 9층탑이나 당나라 수도 장안의 대안탑 (大雁塔) 7층이 그 도시 위로 군림하던 것과 버금갔다.

그런 5층누각과 함께 그 곳의 황종조 (黃鍾調) 종소리가 아침 저녁으로 울려퍼져 송도사람들의 생령 (生靈)에 깊이 위안을 베풀었다.

지금은 그 종이 입을 다물고 있다.

안내원은 정월 초하룻날 종을 칠 만한 일이 있을 때는 친다 하지만 그 종의 오랜 침묵이 내 마음에 담겨졌다.

문득 서울의 한 탑이 생각났다.

지금 경복궁 안에 안치된 원각사 다층탑은 그 이전에는 탑골 원각사탑이었는데 본디 그것은 개성에서 옮겨다 놓았다는 설이 있다.

어거지일 것이다.

다만 그 탑의 미학이 철저히 고려의 그것인 것만은 분명하다.

개성은 반드시 고려 망국의 수도만이 아니다.

조선의 태조.정종.태종 3대의 파란 많은 왕권이 그 곳에서 영위된 것이다.

그런데도 개성은 한양으로 이동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채 태조가 즉위한 수창궁조차 이제는 어림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다.

한반도에서의 역사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무자비하다.

역사의 많은 부분이 니힐 (허무) 이었다.

만월대 관리원 림길흥 (55) 씨의 말주변 없는 한마디가 송도를 떠나는 내 등뒤에 있었다.

"우리보다 우리 아들이 나을 것입네다. 우리 아들보다 손자 때가 나을 것입네다. "

이런 소박하고 절박한 희망은 이제까지의 수많은 희망들이 절망 가운데 빠져버리는 삶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봄에 돋아나는 떡잎 같았다.

지난 날 고려시대의 어느 난만한 늦은 봄 아기 불상을 그네 틀에 앉혀서 신심 깊은 아낙네들이 그것을 힘껏 밀어올려 그네 태우던 그 아름다운 의식 (儀式) 이 해마다 지내졌다.

오늘이 아닐지라도 내일이나 모레에는 그런 축복의 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피투성이 한 (恨) 의 도시가 기다리는 미래일 것이다.

이제 나는 공민왕릉으로 간다.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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