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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속 백미 구간 ⑤ 박남준 시인과 지리산 노고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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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운해를 보고 왔다. 산꾼들이 왜 운해 하면 노고단을 으뜸으로 치는지 얼추 알 것도 같았다. 이젠 자랑 좀 하고 다녀야겠다. “노고단 운해 봤어? 안 봤으면 말을 하지 마.” [사진=손민호 기자]

지리산은 대한민국 국립공원 1호다. 남한 내륙에서 가장 높은 산(천왕봉ㆍ1916m)을 품고 있으며, 3개 도(전라남ㆍ북도, 경상남도)와 5개 시ㆍ군(남원시ㆍ구례군ㆍ하동군ㆍ함양군ㆍ산청군)에 걸쳐 있다. 하여 지리산은 그저 높은 산이 아니다. 넓고 깊은 산이다. 화엄사ㆍ실상사ㆍ쌍계사ㆍ천은사ㆍ연곡사 등 이름난 사찰이 유난히 많은 것도, 반달곰을 하필이면 이 산자락에 풀어놓은 것도 다 이 때문이다. 하나 더 있다. 지리산은, 굴곡 심한 한국 현대사와 유독 인연이 깊다. 그 험한 산세에도, 지리산에선 사람 냄새가 난다.

요즘엔 그 지리산 자락에 문화예술인들이 하나씩 들어와 터를 잡아 살고 있다. 그들 중에 박남준(51) 시인도 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맨 꼭대기, 청학동을 등진 채 형제봉을 왼쪽에 끼고 드넓은 악양 들판을 내려다보는 언덕배기 위에서 혼자 틀어박혀 살고 있다. 그와 함께 지리산을 올랐다. week&ampamp; 연중기획 ‘백두대간 속 백미대간’의 8월 코스로 지리산을 택했을 때부터 그와의 동행은 사실 내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리산 시인이 들려주는 지리산 이야기, 지리산에 들며 무엇을 더 바랄까.

◇박남준 시인=1957년 굴비로 유명한 전남 영광 법성포에서 태어났다. 84년 시 전문지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5권을 냈지만 변변한 문학상은 아직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래도 박남준은 유명 시인이다. 지리산에 들어와 산 지 7년째. 시인은 어느새 지리산의 명물이 됐다. 텃밭에 온갖 야채를 기르고, 작년부터는 벌도 치고 산다. 봄이면 딱새가 날아와 그가 겨울에 신는 털신 안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새끼를 낳고, 도시 생활에 물린 문인들은 소주 한 박스 사들고 시인의 처소로 들어와 며칠씩 술을 마시다 돌아간다. 소설가 현기영, 공지영, 한창훈, 유용주, 시인 안상학, 판화가 남궁산 등이 단골 손님이다. 시인이 손수 덖은 차 한 잔 마시고, 시인이 멸치 국물 우려낸 국수 한 사발 먹으면 밤새 술을 마셔도 몸이 가뿐하다.

◇산행 정보=노고단 운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풍경 중 하나다. 일교차 심한 봄·가을이나 장맛비 막 그친 여름 이른 아침에 볼 수 있다. 노고단은 지리산을 오르는 가장 쉬운 코스다. 성삼재(1070m)까지 차가 올라가고 노고단 정상(1507m)까지 3.8㎞ 산행코스도 잘 정비돼 있다.

성삼재에 오르는 유일한 길은 861번 지방도로다. 구례에서 출발하면 천은사 입구에서 입장료(1인당 3000원)를 받지만 반대편 남원에서 출발하면 입장료를 안 받는다. 노고단 정상(사진)은 오전 10시~오후 4시 개방한다. 위반하면 50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week&은 노고단 고개에서 능선을 따라 돼지령까지 갔다가 돌아와 노고단 정상을 올랐다. 승우여행사(www.swtour.co.kr)가 15, 16, 22일 당일 여정으로 노고단 트레킹을 간다. 4만1000원. 02-720-8311.

# 문안인사 또는 섭외
박남준 시인이 지리산에 든 건 2003년이다. 풍진 세상 등지고 홀연히 산으로 들어간 건 아니었다. 그 전에도, 그러니까 십수 년 전부터도 그는 전주 인근 모악산 계곡에서 혼자 살았다. 그때도 그는 어떻게든 지리산에 들어가 살 수 있을까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딱히 사연이 있던 건 아니다. 지리산에서 살면 참 좋겠다, 막연히 동경했을 따름이다. 마침 지리산에 살던 지인이 산을 떠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내 그는 집을 접수했다.

그리고 오늘, 지리산 자락 시인의 처소는 무연고의 등산객이 부러 방문을 할 정도로 명소가 돼 버렸다. 악양면에서 그의 집을 모르는 주민이 없고, 하동군에서 그의 이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좋은 예가 있다. 박남준 시인에게 편지를 보낼 땐 꼼꼼한 주소가 필요하지 않다. ‘하동군 악양면 박남준 시인 앞’만 적어도 편지는 한 번의 사고 없이 시인 앞으로 정확히 배달된다.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넣었다. 남부 지방에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형님, 어떻게 지내십니까.

“비가 하도 많이 와서. 꼼짝없이 갇혀 살고 있네. 그렇지 않아도 새 눈치 보고 꽃 눈치 보며 살고 있었는데 요즘엔 비 눈치 보며 살고 있네.”

-비만 옵니까. 시도 함께 오는 건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네. 오라는 시는 안 오고 비만 오네.”

-좋은 점도 있겠네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 뒤치다꺼리 안 해도 되고.

“그래도 올 놈들은 꾸역꾸역 다 올라오네. 어제도 한 패거리 들이닥쳐서 소주 한 박스 다 비우고 좀전에 일어섰네.”

-소주 또 떨어졌겠네요. 제가 한 박스 싣고 들어갈게요.

“왜, 한 번 내려오게?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형님, 저랑 지리산 한 번 오릅시다.

“지리산에 사는 사람 보고 지리산에 오르자니, 무슨 망발인가.”

-형님 계신 쪽 말고요. 노고단이요. 노고단 쪽은 가본 적 오래됐지요?

“도법 스님 뵈러 갈 때 허구한 날 지나는 길이 그쪽인데 뭘. 노고단은 이제 너무 되바라져서 난 잘 안 가네. 서울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 같긴 하.”(여기서 설명. 몇 해 전 실상사 주지를 맡았다 지금은 큰 스님으로 물러앉은 도법 스님과 박남준 시인은 오랫동안 친분을 쌓은 사이다. 여차하면 둘은 삼보일배니 순례니 해서 전국을 걸어다녔다. 전북 남원에 있는 실상사와 시인이 사는 하동은 차로 한 시간 거리다. 노고단은 그 중간에 걸쳐 있다.)

-노고단 운해 보고 싶어서요. 망망대해 같은 운해 내려다보고 있으면 소식 궁금하던 시 한 수 내려오지 않을까요.

“게으른 시인의 아픈 곳을 찌르는 구만. 이 비만 그치면 운해가 제법 볼 만하긴 할 텐데.”

# 구름바다 위에서
산행은 일찍 시작됐다. 뱀사골 민박집에서 나와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3시 30분. 일출 시각이 5시 언저리였으므로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야 했다. 시인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참 나. 새벽 2시에 눈 부치는 사람더러 새벽 2시에 일어나라니. 악양하고 뱀사골하고 이렇게 시차가 심했나?”

성삼재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별이 가득했다. 오로지 별빛만으로 시인의 표정이 드러났다. 지리산 시인도 이런 하늘은 오랜만인 듯 보였다. 다소 상기된 얼굴이었다.

“어제 오후까지 비가 내렸는데, 이렇게 맑은 하늘이라니. 이놈의 변덕을 누가 맞추고 살 수 있을까.”

“운해가 장관이겠네요.”

흔들거리는 랜턴 불빛에 의지해 1시간 30분을 걸었다. 마침내 노고단 능선 위에 다다랐다. 저 멀리 천왕봉 뒤편에서 붉은 기운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켜켜이 쌓인 능선 아래로 솜이불 모양 두터운 운해가 꿈틀댔다. 노고단 운해가 특히 고운 건, 발 아래 늘어선 저 능선 때문이다.

“운해가 짙은 곳이 물이 있는 곳이네. 섬진강이 흐르는 곳이지. 저런, 악양 내 집엔 비가 오는 모양이네. 운해가 저렇게 두꺼우니 말이네.”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산 위의 하늘은 온통 시퍼런데, 산 중턱은 구름이 둘러쳐져 새하얗고, 구름에 깔린 아래 세상은 흐려 있다니. 시인이 수첩을 꺼내 뭔가 적기 시작했다. 시가 온 모양이었다.

# 산에서의 마음가짐
주능선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지리산은 일단 능선 위에 오르면 길이 쉬워진다. 가파른 경사는 사라지고 순탄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온종일 걸으면 천왕봉(1916m)에 도착한다. 남한 내륙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백두산에서 내려온 줄기가 마침내 천왕봉에 이르러 그 긴 장정을 마감한다. 백두대간이 끝나는 것이다.

노고단 능선에서 1시간쯤 나아가 돼지령에서 준비해온 아침 도시락을 먹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산 위에서 먹는 도시락은 달다. 그 단 맛을 아는지 벌들이 모여든다. 산 위에선 파리보다 벌이 귀찮은(때때로 위험한) 존재다. 도시락을 말끔히 비운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노고단 정상이 개방되는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오전 10시가 되자 막혀 있던 노고단 정상 길이 열렸다. 노고단 정상 일대는 자연 생태계 보호를 위해 제한 개방을 하고 있다. 정상 위에서 능선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신 줄 알았던 운해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전날까지 내렸던 비 덕분이다.

하산을 시작했다. 노고단 휴게소로 내려오니 성삼재에서 올라오는 행렬이 나타났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길을 비켜야 할 만큼 많은 숫자였다. 데이트 나온 청춘남녀, 관광 버스에서 내린 단체 행락객, 아들과 함께 지리산 종주에 도전한다는 젊은 아빠, 채 돌이 안 지나 보이는 아기를 업고 오르는 엄마까지…, 다른 산에선 마주치지 못한 인파였다. 지리산은 역시 지리산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지리산 시인의 얼굴에 난데 없는 근심이 서렸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을 급하게 가는지 몰라. 산은 천천히 가야 하는 건데. 꽃도 들여다보고 하늘도 올려다보고 새소리도 들으며 그렇게 쉬엄쉬엄 가야하는 건데. 이렇게 정신없이 왔다 가면 뭐가 남는 게 있다고. 그러니까 지리산에도 케이블카 놓으라고 요란을 떨지. 어디든 가보는 건 중요하지 않네. 가서 뭘 보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하지. 안 그런가?”


이달의 등산 TIP 배낭 꾸리는 법

▶ 무턱대고 짐을 줄이지 말자. 방풍·방수 재킷, 랜턴, 물통, 나침반, 지도, 압박붕대 등은 꼭 챙겨라. 비상식량은 열량이 높고 부피가 작은 초콜릿이나 육포 등이 좋다.

▶ 배낭 무게가 허리에 무리를 주지 않아야 한다. 침낭·옷 등 가볍고 부피가 큰 것을 아래에, 도시락·물통 등 무거운 것을 위에 넣는다.

▶ 장시간 비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방수 기능이 있는 배낭이어도 커다란 비닐봉지를 배낭 안에 넣어 방수기능을 철저히 하는 게 좋다. 용도나 사용 시기에 따라 작은 주머니에 몇 가지씩 나눠 담는 것도 요령이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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