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1909년 일본군 기록 『진중일지』 첫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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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9월 15일

“적의 사망자 중에서 발견된 것은 15명. 우리 측의 손해는 소비 탄약 382발. 적의 수괴는 이강년인데, 사망자 중에는 그를 찾지 못하였고, 적성은 전부 의병이 점령하고 있음. 전투 후 해당 촌락을 소각함.” (경북 문경 대승사 인근 전투 기록)

#1907년 9월 17일

“문경군 신동면의 김성달(27세). 위 사람은 아군의 상황을 정찰하여 폭도에게 편익을 주고 폭도의 수족으로 거류민에게 손해를 입혀 체포함. 심문 중에 도망을 기도함으로써 오전 11시에 사살함.”

일본군은 조선의 의병을 ‘폭도’로 칭했다. 재판도 없이 양민을 사살했다. 전투의 보복으로 촌락을 불태웠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관장 심광주)은 11일 조선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군이 자신의 활동을 기록한 『진중일지(陣中日誌·사진)』를 처음 공개했다. 1907년 7월 23일부터 1909년 6월 19일까지 일본군 보병 12여단 산하 보병 14연대의 군사활동을 기록한 일지다. 총 14책으로 전체 24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다. ▶1291명의 병력 구성 세부 사항 ▶군비 지급 현황 ▶전투 지도 50여 점 등 당시 군사작전 상황이 상세하다. 매일 매일의 기온도 0.1도 단위까지 표기하고 전투와 정탐 보고를 분 단위로 기록했다.

토지박물관의 심광주 관장은 “일본군 보병 14연대가 한반도 각지를 돌며 의병을 진압한 기록과 다른 일본군의 작전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중요 사료”라고 설명했다. 김성갑 학예사는 “ 손으로 필사를 한 일본군의 공식 군사기록으로 여겨진다”며 “일본 방위청의 소장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는 희귀 자료”라고 말했다.

1907년은 한반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점이다. 4월 고종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비밀리에 특사를 보냈고 현지 공관의 보고로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7월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이 ‘폭도 진압’과 ‘치안 유지’란 명분을 내세워 사실상 무력침공을 한 것이다.

김상기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 일지에는 이강년(1858~1908) 부대와의 교전 등 널리 알려진 의병활동 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의병 부대의 활동도 나온다”며 “‘의병 3도 도원수 윤영수’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일본군은 의병부대의 체계도와 의병장들의 이름·본적지까지 파악해 기록했다. 여기엔 독립유공자 등록에 없는 인명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김 소장은 “사료 검토를 끝내면 이들 중 상당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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