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10만원권 미룰 이유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0만원권 지폐 발행은 오래전부터 논의돼 온 만성적 이슈다.

반대하는 쪽의 입장도 분명하다.

인플레이션 심리를 부추긴다는 것, 음성 고액소득의 현금 결제를 가능케 함으로써 탈세를 용이하게 한다는 것, 현금으로 고액 부정부패를 결제하게 되면 사후 그 증거의 추적이 어렵게 된다는 것 등이 있다.

찬성하는 입장도 주장과 방어를 다 갖추고 있다.

최고 액면을 만원권에 묶어둔다는 것은 오늘날의 거래 규모를 감당하기에는 벅차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는다.

지폐 인쇄비용을 과중하게 하고 장수가 많아 사용에 번거롭다.

이 번거로움을 덜었으면 하는 일반 사용자의 바람을 잽싸게 알아차린 것은 예금은행들이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은행들은 정액으로 된 10만원권과 1백만원권 자기앞 수표를 발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하나는 자기앞 수표는 발행은행으로 돌아오는 시점까지 1회만 사용할 수 있으므로 그 발행비용이 엄청나다.

지난 한해만도 8천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은행들의 부담이므로 만일 이것을 줄여 줄 수 있다면 은행 수지를 크게 개선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정액 자기앞 수표를 은행들이 미리 발행해 금고에 쌓아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앙은행의 독점적 발권력에 대한 미묘하지만 중대한 도전이란 것이다.

이것은 고객이 요구하는 액수에 따라 은행이 수시로 자기앞 수표를 발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은행은 이 점 때문에 수년전 정액 자기앞 수표의 발행에 대한 반대캠페인을 벌인 적도 있다.

10만원권이 발행되면 인플레이션 심리를 촉진시킬 것이라는 염려는 지나친 신중함이라고 반박받을 만하다.

인플레이션이 급하게 진행되고 있는 환경에서 거기에 맞추느라고 자꾸 더 큰 고액권을 발행하고 있는 경우에나 이런 염려가 타당할 것이다.

미국의 1백달러권이나 일본의 1만엔권은 우리 10만원권보다 가치가 더 크 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촉진되고 있지는 않다.

고액권이 탈세나 뇌물 등 범죄에 이용되기 쉽다는 이유 때문에 발행을 미루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범죄의 방지와 처벌은 고액권 발행과 별개로 보아야 한다.

비행청소년이 흡입한다고 해서 화학접착제를 만들지 말아야 하고 살인에 쓰인다고 해서 칼을 팔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것이 10만원권 발행을 찬성하는 쪽이 전개하는 일련의 논리다.

게다가 경제후퇴기에 있는 지금이 고액권 발행 시작의 적기라는 타이밍론까지 동원한다.

우리 역시 10만원권 발행을 더 미룰 이유가 없다고 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