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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북한탐험]13.송도충절 송도삼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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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개성 거리는 개성답게 정갈했다.

개성은 고대에는 삼국 각축장의 송악군이다가 고려 광종 때에야 개경 (開京) 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된다.

서울을 열었다는 뜻 그대로. 그 뒤 조선 성종 때 개성부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38선 이남이었고 휴전선 이북이었다.

그런데 개성이라는 본명보다 송도라는 별명이 그 곳의 사연을 더 풍류적으로 담고 있다.

고려가 망한 뒤 그 곳 사람들은 이성계.이방원의 조선에 호락호락 고개 숙일 수 없었다.

개성 부근의 두문동 산골에는 고려 유신 70여명이 세상을 등져 숨었다.

정몽주.이색에 이어 그들 역시 회유에 따르지 않아 조정에선 몽땅 불질러 태워 죽이고 만다.

멀리 강원도 치악산으로 들어간 원천석이나 정선땅으로 간 7명만이 그런대로 목숨을 부지해 개경을 향한 망국의 비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장마가 질라나/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이 정선아라리 속의 만수산은 물론 개성 만수산이다.

이런 사정이므로 개성 사람들은 그들 자신만의 망국 경제권을 만들어 나갔다.

진작 고려는 예성강 하류 벽란도에서 개성 성 안에 이르기까지 비 오는 날 즐비한 가게들의 처마 아래로 비를 맞지 않고 왕래할 만큼 상업이 번창했다.

송나라 장사꾼이야 그렇다 치고 대륙 오지의 실크로드 장사꾼이나 페르시아 상인들까지 정착하는 국제무역의 기지였다.

고려가요 속의 '회회 (回回) 아비' 란 바로 아랍 사내를 말한다.

그런 고려의 상업을 계승한 개성사람들은 일찍이 옛 음양사상이 반영된 사개치부법 (四介治簿法) , 즉 복식부기법 (複式簿記法) 을 발명해 낼 수 있었다.

사개 (四介) 란 주는 자, 받는 자, 주는 것, 받는 것의 네가지 거래요소다.

'서울깍쟁이' '수원깍쟁이' 와 함께 '개성깍쟁이' 도 아마 이런 철저한 상업과 관련되기 십상이리라. 개성 성균관 안내원은 안내 뒤에 반드시 토를 달듯이 깍쟁이는 가게장이에서 유래된 된소리라고 강조했다.

아무튼 일제시대에도 개성 상인은 전국에 알려진 상업의 모범이었고 그 곳의 송도상업학교는 고려 이래의 개성실업을 익히는 명문이었다.

개성사람의 삶은 누구에게 폐 끼치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누가 폐 끼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앞뒤가 깔끔하다.

이런 성정 (性情) 은 그 곳 지세를 반영하는지 모른다.

개성은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독립된 산악지대에 터를 잡은 도시다.

북쪽으로 천마산이 있고 성거산.영축산이 모둠으로 솟아 있다.

그 아래 송악산이 있는데, 그 동쪽으로 오관산.용암산의 골짜기가 수려하다.

오관산 기슭에 여러 계곡과 담 (潭) 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화담 (花潭) 이다.

그 곳 초막에서 서경덕 (徐敬德) 이 살고 있었다.

서경덕은 조광조 (趙光祖)가 현량과 (賢良科)에 천거함에도 응하지 않고 초야의 자연철학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이런 불응이 당대 미인 황진이 (黃眞伊) 의 간절한 유혹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만물의 이름들을 벽에 써 붙여놓고 그것 하나하나를 고구 (考究) 해나가는 한편 그의 주기일원론 (主氣一元論) 은 이를테면 성리학의 이 (理)에 대한 기 (氣) 의 노선이어서 성리 좌파였다.

이이 (李珥).이지함 (李之함) , 그리고 허엽 (許曄).성혼 (成渾) 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단초 (端初)에 서경덕이 있음이었다.

그의 독특한 우주연구는 다른 사람들이 '유자가 아니다 (非儒)' 라고까지 헐뜯게 했다.

천마산.성거산 사이에 느닷없이 내리꽂히는 절벽 34m의 박연폭포가 있다.

서경덕.황진이와 함께 송도3절 (絶) 인데 인간 남녀와 자연의 한 부분을 3절로 말하는 것이 여간 아니다.

진리는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을 본받는다 하거니와 여기 멋진 3절에 자연이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서경덕의 무덤이 개성시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또 거기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황진이의 무덤이 있다 한다.

시인이며 만인의 연인인 황진이는 그녀가 누구의 아내라는 유교적 한계를 뛰쳐나감으로써 조선 전기의 시 세계에 찬란한 꽃을 피워낸다.

즉흥으로 읊어낸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입에 달고 다니는 시조가 아닌가.

또한 수많은 장부들이 그녀를 흠모하던 것과는 달리 그녀가 오직 화담의 서경덕을 지향하는 일편단심도 눈부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이렇듯이 절묘한 모국어의 감흥은 그녀의 간장녹는 시심 만이 노래할 수 있는 연심 (戀心) 의 극치가 아니런가.

뒷날 황진이의 무덤에 술을 따라 올리고 추모의 시를 읊은 시인 임제 (林悌)가 발령받은 임지에 닿기도 전에 기녀 성묘사건으로 파면당하고 만다.

그만큼 황진이는 죽어서도 송도의 명예이자 개성의 뮤즈이고 비너스였다.

그런데 이 송도3절은 정작 고려의 것이 아니라 조선의 것이므로 개성을 고려의 그것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선죽교를 피해갈 수 없다.

선죽교야말로 고려의 혼백이다.

송악 동남쪽 용수산, 서쪽 만수산.오공산, 서남쪽 진봉산, 동쪽 덕암봉.부흥산들이 송악을 주산 (主山) 으로 삼고 개성을 울치는데 그 산들이 다 선죽교 하나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고려 무신정권 시절 놓여진 선죽교는 그 당시로는 드물게 화강석 돌다리였다.

이방원의 군사 조영규가 정몽주를 쳐죽인 비극이 바로 선죽교에서 있게 되는데 이에 앞서 이방원과 정몽주가 하여가 (何如歌) 로 회유하고 단심가 (丹心歌) 로 의지를 밝히는 시적 행위는 얼마나 멋진 노릇인가.

아니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가는 길을 경계하는 그의 어머니는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의 시조를 읊는데 그 또한 얼마나 멋있는가.

이런 멋이 공연한 것이 아닌 바가 바로 고려청자와 고려대장경의 신적 (神的) 경지가 있는 연유다.

지금의 선죽교는 대나무가 돋아났다는 것도 전설이고 핏자국도 전설일 뿐 다리는 저 혼자 오래 잠들어 있다.

정몽주가 죽은지 약 4백년 뒤 정조 때 후손 정호인 (鄭好仁) 이 개성유수로 부임해 선죽교에 난간을 세워 기념물로 만들고 그 대신 옆에 새로 다니는 다리를 놓았다.

오직 고려의 충신 정몽주 하나 만을 위한 존재가 선죽교인데 그래서 고려와 고려의 서울 개성의 표상이 바로 이 알뜰한 규모의 다리인 것이다.

그의 집터에 사당 송양서원을 세워 '만고강산 일대충의' 를 선양함도 오늘의 나그네 걸음을 멈추게 하고 남는다.

그런데 그의 무덤은 남한 경기도 용인에 있다.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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