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진 대표작가 ‘2009 오디세이 전’ 9·끝-고명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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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근씨가 필름 이미지로 쌓아올리며 만든 공간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다. ‘빌딩-18, 2007, 56X48X43㎝, 필름·플라스틱.

고명근의 사진은 운명에 대해 말한다. 운명은 시간의 개입을 통해 완성된다. 고명근은 낡은 건축물과 서양 고전 조각을 주로 찍어왔다. 건축물은 그 퇴락한 표정으로 시간의 침식에 관해 이야기한다. 조각은 그 기념비성으로 시간에 대한 저항, 하지만 끝내 성공할 수 없는 저항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찍은 사진은 그 모든 게 찰나라는, 존재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게 운명인 것이다.

사진을 뼈대로 하고 있으나, 고명근의 작품은 전통적인 의미의 사진이 아니다. 일단 대다수의 작품이 입체로 이뤄져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는 찰나를 훔치는 사진과 기념비성을 지향하는 조각을 합쳤다. 이 구성 자체가 ‘유한하지만 영원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고명근이 즐겨 포획하는 이미지는 미국과 한국의 변두리 지역에서 발견한 낡고 허름한 건물과 서양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대 로마 시대 혹은 18~19세기의 서양 대리석 조각이다.

고명근은 이런 사진들로 입체, 주로 입방체 형태를 만든다. 요즘 그가 만드는 입방체는 대부분 육면체 꼴이다. 건물을 촬영한 필름 앞뒤로 투명 필름을 여러 장 붙여 단단한 면을 만드는데, 원본 필름 이미지를 여러 개 복제해 동일한 이미지의 면을 네 장 만든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전후좌우로 이어 붙여 각각의 면이 똑같은 장면을 연출하게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비록 필름 위에 건물의 이미지가 또렷이 나타나 있다 하더라도 필름이 가진 투명성으로 인해 뒷면이나 옆면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게 된다. 이 중첩의 효과는 이미지들로 하여금 실체는 없고 동시다발적인 환영이 되게 한다. 그렇게 고명근의 작품은 ‘실체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실체로 인식한다. 우리가 만지고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것을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의 힘은 이 모든 실체를 환영으로 만들어버린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모든 것은 끝내 기억의 환영으로 남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조차도 희미하게 기화할 뿐이다. 영원히 실체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인류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인류의 화려했던 문명도 종국에는 우주의 아련한 환영으로 남고 말 것이다. 돌 위에 돌조차 남지 않을 상황이 되면 과연 그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실체란 그저 어느 한 순간의 환상이요 환영일 뿐이다.

어쩌면 이런 작품을 통해 고명근은 사진의 본질과 인생의 본질이 같다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진이 찰나를 찍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인생은 찰나가 아닌가? 우리는 사진이 금세 빛이 바래고 오래 보존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우리 인생보다는 오래 간다. 순간을 포착하거나 순간을 살지만 영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딜레마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사진과 인생은 결국 하나다. 고명근의 입방체는 그 딜레마를 기리는 작은 기념비다.

이주헌(미술평론가·저술가)

◆고명근=1964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미국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조각과 사진을 좋아하고 공부한 인연으로 실재적이고 입체적인 구조와 환영 같은 이미지를 결합하는 숙명을 만났다. 예술의 역사에서 몹시 드문 시도이자 고통스러운 그 과정에서 1980년대 후반 조각과 사진을 접목한 ‘사진조각’을 창안해 주목받았다. 컴퓨터 사업으로 유명한 미국 마이크로 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이 그의 작품을 구입해 세계 미술시장에서 화제를 일으켰다.



전시는 1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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