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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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6장 두 행상

그런데도 두 상인은 선뜻 내키지 않는 듯 좌판을 빙빙 돌며 하자가 있는 오징어만 골라 뒤적거리면서 불평만 늘어놓았다.

거동으로 보아선 도매상들 같기도 해서 잘 구슬리면 적어도 50여 축 이상은 처분할 수 있겠다는 예감이 있었지만 흥정을 서두르지 않는 감질나는 거동에 조바심만 쌓여갔다.

올해 따라 오징어 풍년이라 잽싸게 처분하지 않으면 애물단지 모면하기는 어렵게 되겠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철규는 한 축에 소매로 2만3천원까지 호가하던 상품 한 축 (2㎏ 20마리) 을 1만7천원으로 에누리해 주었다.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그러나 두 상인이 사간 오징어는 겨우 열 축에 불과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점포를 갖고 있는 도매상은커녕 잡살뱅이 노점상들이었다.

조바심 때문에 그들의 본색을 파악하는 눈썰미조차 가질 수 없었고, 결국은 밑가는 장사를 한 것이었다.

오징어 열 축을 흥정하는데, 40여 분의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보내고 나니 기력이 소진되어 주저앉고 싶었다.

어수룩하게만 보이던 노점상들에게 딴죽을 걸려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었다.

그런 모든 것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불신풍조가 원인이었다.

허탈했던 변씨도 좌판 뒤쪽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씨발, 강원도 놈 경상도 와서 피보고 말았네. 바닷바람에 단련되고 소금에 전 주문진 오징어 장사가 양반동네로 소문난 안동장에 와서 딴죽이 걸렸다면 어느 개아들 놈이 믿을까. 그 놈들이 진짜 울릉도 오징어를 찾았던 게 아니라, 남의 살 깎아먹으려는 음흉한 속셈이 있을줄은 미처 몰랐구만.

씨발, 오징어 열 축을 팔려는데도 속셈이 뭣인가를 먼저 살펴봐야 속차리는 망할 놈의 세상이 되었뿌렀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철석같이 믿는 놈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되었뿌렀으니,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어디에 등을 기대고 살아야 하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더라고 이게 모두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보복하고 증오하는 속좁은 위인들이 도처에 득실거리는 윗물 탓이야.

윗물에 놀고 있다는 위인들, 겉보기에는 멀쩡한 허우대에 게트림하고 있어도 남의 상채기에 흠집내기 일삼고 시치미 잡아떼기를 보통으로 알기 때문에 세풍이나 총풍이니 해괴망측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된 거여. 그런 병통이 술수를 부리지 않으면 3천원짜리 배추 한 포기도 올곧은 것을 살 수 없는 장바닥까지 흘러들었다면, 우리 풍속이 병이 들어도 아주 단단히 든 게야.

이기면 살고 패하면 죽는다는 군대식 사고방식이 아직 해결 안되고 있기 때문에 배추 한 단 흥정에도 목숨을 건 것처럼 게거품 빼물고 삿대질이 오가고, 오징어 한 축 흥정에도 술수가 개입되어야만 고소하고 속이 시원한 게야. 체통과 염치를 위중하게 여기던 세상이 언제부턴가 남이야 개죽음을 당하든 말든 제 잇속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풍조가 스며들어 우리를 병들게 했뿌렀어. 그 놈들 봤어?

저들이 저지른 것이 분명 사기였는데, 아모리 살펴봐도 사기꾼들처럼 보이더냐구. 씨발, 칵 죽고 싶네. 우리 행중을 업어다 곤장 맞히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으니 내 체면은 또 이게 뭐야. " 참다 못한 태호가 곁으로 다가가며 이죽거렸다.

"대선배 고정하세요. 같은 처지에 있는 행상들에게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것 가지고 비약이 심하세요. 다방 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오세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 "가근방 장터에 다닐 땐 다방 출입않기로 작정 단단히 고쳐가지고 왔어. " "의성에 갔을 때 창피 당한 걸 가지고 안동에서부터 겁먹을 건 없잖습니까. "

"안동 외장꾼들이 의성장 출입하고 의성 외장꾼들이 안동장 출입한다는 걸 모르나?" "안동과 의성은 같은 2일 7일장인데, 의성장에서 만났던 그때 그 놈을 다시 만날 확률은 적습니다. 다방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오세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니깐요.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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