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남북경협 이제부터 할 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현대그룹 정주영 (鄭周永) 명예회장과 북한 김정일 (金正日) 총비서의 만남을 계기로 대북 (對北) 경제협력사업이 획기적인 전기를 맞고 있다.

이번에 북한의 최고실력자가 지원의지를 확인해 줌으로써 금강산관광사업 등 현대의 대북사업은 '날개를 단' 셈이 됐다.

이번 만남이 현대의 대북사업에 대한 단순한 '보증' 의 의미를 넘어 경제교류와 남북관계 개선에 새로운 장 (章) 을 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에 현대가 가져온 '경협보따리' 는 규모와 분야에서 모두 엄청나다.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그동안 소규모로 분산돼 진행돼 온 남북경협을 대규모로 체계화.조직화할 수도 있다.

남북관계 개선의 '메신저' 로서 鄭회장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방대한 규모의 경협이 구체화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특히 대북경협은 남북정치상황에 워낙 민감해 남북관계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스스로 한계를 지닌다.

새 정부의 '햇볕정책' 과 정경분리원칙에도 불구하고 북한측의 신뢰성 부족.잠수정침투사건.로켓발사 등의 '돌출악재' 로 번번이 남북경제교류가 원점으로 되돌아간 사례들을 우리는 보아 왔다.

현대는 금강산관광사업의 독점권을 얻고 남북민간경협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됐다.

그러나 이전처럼 돌발사건으로 대북사업 등의 교류가 졸지에 얼어붙는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번 합의를 남북한간 진정한 신뢰조성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서해안공단 건설.북한인력의 제3국진출 등 현대가 추진키로 한 사업들의 상당수는 민간부문의 협력만으로는 안된다.

책임 있는 당국자들이 만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줘야 한다.

북한이 '남한당국 배제원칙' 을 고수한다면 경협활성화는 물론 남북관계의 진정한 개선은 어려울 것이다.

민간경협이 급진전 계기를 맞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정부당국과 현대는 들뜨지 말고 차분한 대응으로 임해야 한다.

북한의 원유매장량은 과연 경제성이 있는지, 남북대치상황 속에서 송유관 건설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는지 등 방북보따리 속에는 미심쩍은 내용물들이 한둘이 아니다.

국내기업들이 뒤질세라 너도나도 대북투자에 뛰어들어 과당경쟁을 벌이는

일도 자제해야 한다.

특히 사업당사자인 현대그룹은 대북경협사업이 갖는 특수성과 상징성을 고려해 투명하게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대북사업을 선점 (先占) 하려는 욕심에서 이면계약이나 뒷거래를 한다면 북한측 의도에 본의 아니게 말려들 뿐 아니라 훗날 엄청난 후유증을 낳을 수도 있다.

이번 만남으로 남북관계에서 불가측성 (不可測性) 이 말끔히 가신 것은 아니다.

'유비무환' 의 자세로 남북경협에 임해야 한다.

금강산관광개발비로 제공될 거액의 달러가 북한의 군비강화쪽으로 전용될 것을 우려하는 일각의 목소리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경협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조용히 추진할 것을 당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