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읽기 BOOK] “손쓸 도리가 없구나” 문인 열넷의 짠한 연애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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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설렘
김훈·양귀자·박범신
이순원 외 지음
랜덤하우스, 240쪽
1만2000원

설렌다는 건 당신이 이제 막 사랑의 시동을 걸었다는 뜻이다. 가슴 한켠에서 쿵쿵 설렘의 소음이 들렸다면, 당신은 이제 막 사랑의 기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설렘이란, 그러므로 모든 사랑의 신호탄이다.

이 책은 우리시대 대표 소설가들이 들려주는 설렘의 추억담이다. 14명의 작가들은 자신이 직접 겪었거나 곁에서 지켜봤던 사랑을 재잘재잘 이야기한다. 불현듯 사랑의 강물에 뛰어들어 허우적댔던 그들의 연애담이 참 빤하고 정겹게 읽힌다.

소설가 김훈씨는 책에서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라고 쓴다. 사랑이란 이처럼 대책 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의 비전향 장기수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소설가 은미희씨의 사랑 얘기도 꼭 그렇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짝사랑했고, 훗날 연인이 되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랑을 찾은 ‘당신’에게 글을 쓴다. 친구의 남자친구였던 ‘당신’에게 품었던 애틋함에 대해 그는 “사랑은 아무리 독심을 품는다 해도 결국은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소설가 양귀자씨는 우연히 알게 된 한 여성의 얘기를 ‘참 대책 없는 어떤 사랑’이란 글에 담았다. 이 여성은 헤어졌던 옛 남자를 혹시라도 다시 마주칠까 싶어 일요일마다 추억이 깃든 공원에 나온다고 했다. 양씨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고 김광석의 ‘그날들’이란 노래 가사를 옮겨 적었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사랑이란, 다만 사랑하는 일이란, 이토록 속수무책이라 아름다운 걸까. 전쟁통에 헤어졌다 수십년만에 다시 만난 두 노인이 여관에서 서로를 어루만지는 이야기(이순원)나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이들과 살을 부비며 “그를 사랑하듯 그의 아이들을 사랑했다”라고 고백하는 모습(고은주)이 덮어놓고 아름다운 건 그래서다.

사랑이란 격정적일 때 가장 또렷할 테지만, 사랑을 지탱하는 건 가슴으로 삼켜낸 연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설렘으로 출발해 연민에 이르게 된 작가들의 연애담을 맛깔스런 문장에 담았다. 읽다보면 종종 먼 하늘을 바라보며 나만의 그 혹은 그녀를 추억하게 된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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