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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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6장 두 행상

어쩌다 내뱉은 단순한 고백이라고 말하기엔 어려운 고뇌의 흔적이 진하게 자리잡은 독백이었다.

그러나 철규에겐 그 말이 어둠과 습기로 가득찬 음험한 골짜기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철규는 본능적으로 그 음험한 독백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누운 채로 몸을 돌려 철규를 빤히 바라보면서 한 손으로 다시 철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철규의 반응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침묵이 흘러갈 뿐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거둔 수확이랄까. 때로는 비도덕적이라고 비난받은 적도 있었으니까 점령군이나 해적들처럼 노획물이라고 말할까요. 하루는 현실적으로 내 소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노트에 또박또박 적어 가면서 꼼꼼하게 점검해본 적이 있었어요. 절대적인 가치로 따지든 상대적인 가치로 따지든 하잘것없다고 볼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철규씨가 내 인생에 개입되면서 그 모든 것들이 하잘것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하지만 잠시 철규씨를 만나고 헤어져 이성적인 내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 모든 것들이 다시 나름대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해요. 철규씨가 내 곁에 없을 때는 그런 것들이 나를 무척 위로하고 있는가 봐요. 그런 서류들이나 통장 같은 세속적인 것들에게서 한없는 위로와 편안함을 함께 느끼게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어요. 세상의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언젠가는 떠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잖아요.

사람들은 그것을 생명 가진 것들의 본질이면서 역동성이라고 말하지만, 철규씨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겐 그렇게 비치지 않고 떠난다는 이미지로만 자리잡고 말았어요. 그래서 역동성이 제거된 그런 물건 따위들이 오히려 내게 인간적인 위안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 "그래서 어쩌면 좋으냐고 말했었나?"

"그랬던가 봐요. " "구릉지 아래로 굴러가는 굴렁쇠처럼 난 벌써 멈출 수 없는 생물이 되어버렸어요. 굴러가는 이미지를 갖고 있든 떠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든 난 이미 어쩔 수 없게 돼버렸소. 물론 내 인생이 이렇게 반전된 것도 우연이었지. 그러나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고 불가사의한 우연이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어요. 어쩌겠어. 우연이 지시하고 있는 방향대로 살아야지. 다만 닥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

"알고 있어요. 이제 그만해요.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을 꺼냈었어요. " 그녀는 두 팔을 뻗어 철규를 껴안았다.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순간,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 땀으로 흠뻑 젖어 있던 그녀의 살갗은 목욕시킨 어린아이들의 살결처럼 뽀송뽀송하게 되살아나 있었다.

철규는 시선을 내리깔고 엎드려 있는 그녀의 나체를 바라보았다.

잘록하게 절제된 잔허리에서 푸짐한 둔부로 오르는 굴곡은 밤빛에서도 선명했다.

솔직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는 여자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아름다운 것을 만지고 싶은 충동은 제어하기 쉽지 않았다.

그녀는 철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또 다시 충동이 일어났다.

그녀가 곁에 있을수록 뭔가를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철규가 그녀를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했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한 몸이 되었고, 길고 긴 애무가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또 다시 땀투성이가 되어 뒹굴었고, 그녀의 신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가득 채워나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간 뒤에 그녀는 일어나서 욕탕으로 가서 마른 타월을 걷어와 철규의 몸을 알뜰하게 닦아주면서 말했다.

"나 새벽차로 떠나야 해요.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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