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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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6장 두 행상 ③

변씨에게 빈축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철규는 약속하고 성민주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단순한 성격의 변씨가 성민주가 나타남으로써 반사적으로 집 나간 아내를 찾아나서야 하겠다는 결심에 이를지도 몰랐다.

두 번 다시는 장돌뱅이로 나설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변씨였지만, 지난밤 부둣가에서의 독백으로 보아서 작정을 고쳐먹을 여지가 엿보인다는 짐작 때문이었다.

그녀가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도착한 버스 차장을 통해 눈이 유난히 큰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철규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도둑질하던 소년처럼 맹렬하게 가슴이 뛰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버스가 정차한 이후에도 한참이나 좌석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비 갠 날 오후, 햇살의 기울기를 따라 버스 정류장의 난삽한 풍경들이 수채화처럼 비쳤다 사라지는 차창을 통해 풍경처럼 바라보이는 그녀는 그 존재만으로도 안타깝도록 아름답다는 생각을 철규는 하고 있었다.

맨 나중에 버스를 내려오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주었지만, 철규는 웃기만 했을 뿐 상투적인 인사말을 나누진 않았다.

어떻게 올 수 있었느냐, 집은 어떻게 하고 왔느냐는 일상어들은 될수록 삼가자는 서울에서의 약속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나란한 걸음으로 정류장을 빠져 나오면서 접어두기로 약속했었던 그런 말들이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궁금한 것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성민주는 해안도로로 나서면서 먼저 말을 건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차창에 비치는 풍경은 평범한 여름 그대로였는데, 살갗에 스치는 바람은 완연한 가을이었어요. 동해 쪽으로 들어서면서 사뭇 흐릿하기만 했던 갯비린내가 주문진 시가지로 들어서는 길로 코에 물씬 풍기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하던 걸요. 몇 분 안에 철규씨를 만날 수 있는데도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도록 보고 싶었어요. 갯비린내와 철규씨는 나한텐 이제 정착된 이미지로 자리잡고 말았어요. 그동안 수없이 바닷가를 다녔지만 바다란 언제나 관념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는데…. " 사랑의 언어들로 여과되고 정화된 성민주의 말이 문득 낯설었다.

장바닥에선 일상사로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하면서 철규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어 주었다.

"아이들처럼 갑자기 자장면이 먹고 싶어요. " 그들은 허름한 중국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장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 그녀를 철규는 몇 번인가 엿보았다.

그 천진난만함이 어색해 보이거나 거북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의 거동 하나 하나가 사랑의 이름으로 채색되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악덕이나 자제력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는지도 몰랐다.

중국음식점을 나선 그들은 선착장의 어물난전으로 향했다.

해질 녘이었지만, 조업 채비를 하고 있는 어선들이 부두에 빼곡 들어차 있었다.

그녀는 어물난전에서 반건조된 가자미 몇 마리를 사들었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변선생님 선물을 챙기지 못했어요. " 염복이 넘치는 사람이야. 성민주가 달려온 것을 보고 변씨는 그렇게 이죽거렸다.

성민주에 대한 거부감이 깨끗하게 청산된 것은 아니란 어투였다.

그러나 성민주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 변씨에게 전혀 거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깐 변씨를 만나고 나오면서 그녀는 개운찮은 기색을 보이는 철규에게 말했다.

"창피스럽게 생각지 않아요. 아내 없이 혼자 생활하고 있는 분이니까. 나 같은 여자가 못마땅하게 보일 수밖에 없겠죠. 새 장가를 들든지 집 나간 아내를 찾아서 가정생활을 다시 시작한다면 세상이 새롭게 보이게 되겠지요. 철규씨가 나서보면 어때요?" "내가 나서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집 나갔다는 저 분의 아내를 찾아주는 일이지요.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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