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김정일-빌 클린턴 전격 회동, 기대 크지만 우려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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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어제 북한을 전격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양측 간 공동 관심사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나눴다고 북한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전직 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1차 핵 위기 때였던 1994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다. 북·미 관계에서 벌어지는 또 한 번의 깜짝 쇼를 바라보는 우리의 심경은 복잡하다. 기대가 크지만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백악관 대변인이 밝힌 대로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공식적인 방북 목적은 5개월째 북한에 억류돼 있는 두 미국 여기자의 석방 교섭이다. 3월 17일 북·중 국경 지대에서 취재 활동 중 북한군에 체포된 유나 리와 로라 링 등 두 여기자에 대해 북한 사법당국은 지난달 조선민족적대죄와 비법국경출입죄 등을 뒤집어씌워 12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상식을 벗어난 중형이다. 우리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번 방북으로 두 여기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5개월째 억류돼 있는 개성공단 근로자 유씨와 지난주 동해에서 나포된 연안호의 선원도 풀려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바란다.

인도적 문제와 북핵 문제를 분리한다는 미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상황의 엄중함도 엄중함이지만 그가 갖는 무게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과 후계 문제로 북한 체제의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2차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로 한반도 정세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맞서 미국은 국제사회와 함께 대북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진행된 여기자 석방을 위한 물밑 교섭에서 미국과 북한이 클린턴 전 대통령 같은 중량감 있는 상징적 인물의 방북에 합의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면서도 북한이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약속하면 포괄적 패키지를 통해 북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당근을 흔들어 왔다. 북한은 북한대로 북·미 간의 고위급 회담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우리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번 방북이 대결 국면을 대화 국면으로 바꿔놓음으로써 궁극적으로 북핵 문제의 일괄 타결로 가는 전환점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그렇지만 대화만을 추구하다 결국 북한의 페이스에 말려든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제재와 대화를 병행하는 투 트랙 전략을 일단은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 미국은 북한의 핵 보유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하에 한국이나 일본 등 동맹국과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우리 정부도 현 상황을 냉정히 바라보고, 남북 관계의 경색 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로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고, 필요하다면 8·15 경축사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남북 관계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과감한 제안을 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