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허리' 없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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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의 정치를 오래 연구해 온 일본 다쿠쇼쿠 (拓殖) 대학의 다나카 (田中明) 교수는 '한국정치를 투시한다' 는 그의 저서에서 '우두머리의 결단으로 정국이 일변하는 현상' 을 한국정치의 한 특징으로 지적했다.

그는 5공 시절의 몇가지 사례에서 이런 그의 견해를 밝혔다.

가령 정부와 여당조직의 대부분에게도 청천벽력이었던 6.29선언은 全씨 또는 盧씨라는 우두머리의 결단이었다.

85년 학원안정법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도 우두머리인 대통령이 입법을 무기연기하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86년 야당의 개헌요구로 위기가 왔을 때도 우두머리가 '재임중 개헌가능' 의 결단을 내렸다.

다나카 교수는 이런 결단이 갖는 공통점으로 "조직과는 상관없이 우두머리가 단독으로 내리는 것" 이란 점을 들고 있다.

학원안정법의 경우 우두머리의 결단이 있던 그날 정부는 차관회의에서 법안을 논의하고 있었고 여당에서는 전국구의원 22명이 법안의 홍보대책을 협의하고 있었다.

다나카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새삼 제도를 초월해 경.연 (硬軟 : 강경.온건) 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소불위 (無所不爲) 의 대통령의 힘을 깨달았다고 썼다.

야당정치인들이 일만 벌어지면 대통령과의 회담을 요청하는 것도 국회에서 장장 심의를 하기보다는 대통령과 얘기하는 것이 해결이 빠르기 때문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지금이 6.29선언때나 학원안정법파동과 같은 위기라고는 할 수 없다.

정통성없던 권위주의정권의 그 시절과 정통성있는 민간정부의 지금을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새삼 다나카 교수의 글이 떠오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두머리의 결단' 에 의존하는 우리 정치의 특징은 전혀 변함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속에서도 지난 40일간 여야는 극한대립을 보여 왔다.

의원사정과 의원빼가기, 이른바 총격요청사건 등으로 여야는 국회 장기공전을 무릅쓰며 험악하게 치고받았다.

야당에선 장외투쟁과 화형식.단식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나왔고, 여당에서도 급기야 야당총재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이회창 (李會昌) 배제론' 까지 나왔다.

그런 극한대립이 양쪽 총재의 결단 또는 지시형태로 돌연 국면전환이 이뤄졌다.

야당총재가 '고독한 결단' 으로 국회복귀를 선언했고,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도쿄 메시지' 를 보낸 것이다.

이어 청와대회동이 이뤄지고 극한대립은 소강 (小康) 으로 숨을 죽였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영수회담으로 정국이 풀리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처럼 우두머리의 결단에 의지하는 우리 정치의 특징은 그대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10년전은 권위주의시절이라 그랬다고 하더라도 왜 지금도 우두머리의 결정이 있기 전에 여야정당이 국면전환을 위한 아무런 효과적인 조치도 취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 40일간 여야간에는 난국을 풀기 위한 대화다운 대화, 협상다운 협상이 한번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싸우기만 했던 것이다.

정치인이라면 고 (故) 김상협 (金相浹) 총리의 말대로 막힌 곳은 뚫고 맺힌 것은 푸는 정치활동을 해야 할텐데 보스 밑의 나머지 정치인들은 직책이 높고 낮고에 상관없이 주어진 노선 한 길로만 뛰어간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왜 경제난국을 더 어렵게 만들고 국민이 진저리치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자발적.능동적으로 국면전환의 정치를 꾀하지 못했을까. 답은 뻔하다.

그들에겐 권한과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야당은 사정이 좀 다르지만 여당의 경우 위에서 내려오는 결정을 따라가야 하는 정치구조는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심하게 말해 중간간부나 일반의원들은 바지저고리에 다름없다.바지저고리끼리 무슨 협상을 하겠는가.

만일 그들에게 권한과 책임이 있었던들 정국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진 않았을지 모른다.

갈등요인이 커지기 전에 중간간부끼리 수시로 협상.조정했던들 전면전 (全面戰) 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고 뒤늦게 후회할 강경론이나 과잉충성은 안 나왔을지도 모른다.

얼마전 김종필 (金鍾泌) 총리가 매우 들을만한 얘기를 했다.

그는 여야 모두에게 증오와 협량 (狹量) 을 버리라고 했다.

누구의 누구에 대한 증오와 협량인가.

여야 일반의원들간에 그런 증오와 협량이 있을까. 기왕지사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빨리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앞으로는 정당의 머리뿐 아니라 '허리' 도 권한과 책임을 분담하는 정당민주화로 '결단정치' 의 위험성을 방지하는 것이 시급하다.

송진혁(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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