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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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서적을 뒤지고 자료를 수소문하여 천신만고 끝에 전단을 마련하여 뿌리다 보면 이튿날에는 한술 더 떠서 그림까지 그려 넣은 비슷한 전단이 뿌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윤종갑의 일행에게는 글씨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동업자가 있어서 한씨네의 전단을 근거로 더 자세한 전단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윤종갑을 색출하여 요정을 내고 싶었지만, 철규 혼자의 완력으로썬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욕심이었고, 태호가 나서려 하여도 봉환의 처지를 고려하면 불량스럽게 나설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과 차별화하지 않으면 매상은 제자리걸음을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아무리 지혜를 짜낸다 하더라도 한씨네를 잡아먹기로 이빨을 갈고 있는 그들을 슬기롭게 따돌릴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재고가 쌓여 있는 황태장수를 엎어 치울 수도 없었다.

품목을 바꾼다 하더라도 재고처분이나 한 다음에 고려해볼 일이기도 하였지만, 품목을 바꾸면 필경 그들도 같은 품목으로 바꿀 것이기 때문에 그 또한 대중없이 작정할 것이 못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단 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한동안 내걸지 않았던 현수막에 시구를 적어 내걸기도 하였다.

며칠을 고심하던 끝에 찾아낸 시가 통일에 대한 염원을 성긴 생애를 보낸 한 늙은 뱃사공의 애끓는 푸념을 통해 풀무질하듯 품어낸 이동순님의 '아우라지 술집' 이란 시였다.

그 해 여름 아우라지 술집 토방에서/우리는 경월 (鏡月) 소주를 마셨다 구운 피라미를/씹으며 내다보는 창 밖에 종일 장마비는 내리고/깜깜한 어둠에 잠긴 조양강에서/남북 물줄기들이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수염이 생선가시 같이 억센/뱃사공 영감의 구성진 정선아라리를 들으며/우리는 물길 따라 무수히 흘러간/그의 고단한 생애를 되질해내고 있었다/…사발그릇 깨지면 두세 쪽이 나지만/…삼팔선 깨지면 한 덩어리로 뭉치지요/한 순간 노랫소리가 아주 고요히/강나루 쪽으로 반짝이며 떠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흐릿한 십촉 전등 아래 깊어가는 밤/쓴 소주에 취한 눈을 반쯤 감으면/물 아우라지고/우리나라도 얼떨결에 아우라져버리는/강원도 여량 (餘糧) 땅 아우라지 술집.

어쩌면 생애의 여분을 살아가는 늙은 뱃사공의 눈물 젖은 아라리를 빌리는 설정 때문에 통일의 여망과 회한을 오히려 가슴을 호비칼로 후비고 드는 듯이 그려낼 수 있었던 이동순님의 '아우라지 술집' 을 악다구니와 흥정소리가 난무하는 장바닥에 내건다는 것은 어쩌면 비교분량에도 미달되는 서툰 짓 같았지만 그 시를 내걸었던 영덕장에서는 하교길의 학생들이 열댓이나 몰려와서 시를 베껴가는 성황을 이루었다.

윤종갑이 제아무리 딴죽걸기와 흉내내기에 능숙한 위인이라 하더라도 한씨네가 내건 시구까지 그대로 흉내낼 수 없으리라는 예상만은 적중하였다.

젊은 아낙네들이 한씨네 좌판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펴보았으나 황태장수라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놀라는 눈치였고, 그것 때문에 흥미에도 없는 황태 몇 괘를 들여가는 매상을 올렸다.

동해를 끼고 있는 강구가 불과 시오리 거리에 놓여 있지만, 영덕장의 특산물은 놀랍게도 복숭아였다.

사오월이 되면 오십천을 따라 피어나는 복사꽃이 만발하여 오십천 강가가 온통 붉게 타오르게 된다.

그래서 한 마리에 오륙만원을 호가하기로 소문난 영덕대게는 강구에 가야만 구경할 수 있었다.

울진으로 해서 북으로 올라가 주문진으로 잡았던 노정을 바꾸어 다시 경북의 내륙으로 되돌아선 것은 고추 되팔기로 재미를 보았던 영양 인근의 면소재지 오일장의 매력도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지만, 영양으로 갔을 때 조창석의 마음이 변하여 그대로 눌러앉게 되기를 기대하는 심정도 있었다.

그가 거의 매일이다시피 승희의 좌판매장을 찾아가서 성가심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해코지를 하거나 장사를 훼방이라도 한다면 그것을 핑계하여 실컷 두둘겨줄 수도 있겠는데, 그런 낌새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정말 골칫거리를 만났다는 낭패뿐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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