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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프런트] 장애는 못 고쳐도 불편은 고쳐줄 수 있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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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벗재단 맞춤보조공학센터 직원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서영·김민지 재활공학사, 정영만 팀장, 김동학·장재상 재활엔지니어, 신춘식 재활공학사. [김상선 기자]

서울 용산구 효창동주민센터 뒤 한적한 주택가. 전기톱과 드릴 소리가 정적을 깬다. 소리의 진원지는 사회복지법인 한벗재단 건물.

여느 장애인 복지기관과 달리 이 건물 1층에는 전기톱, 산소용접기, 에어 컴프레서 등 공구가 잔뜩 널려 있어 마치 공장 같다. 이곳은 한벗재단이 운영하는 국내 유일의 ‘맞춤보조공학센터’ 작업실. 장애인의 신체 특성과 능력을 파악해 이들에게 맞는 생활편의 기기를 만들어 주는 곳이다. 지난달 31일 ‘재활 엔지니어’ 김동학(49)씨와 장재상(29)씨는 뇌병변 1급 장애인 김병규(31)씨를 위한 이동용 의자를 만들고 있다.

일식집 등받이 의자를 개조한 바퀴 달린 의자가 완성되면 김병규씨는 망가진 두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고도 목욕탕과 건넌방을 오갈 수 있게 된다. 엔지니어 김씨는 “보조공학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기술”이라며 “휠체어도 장애인의 신체 구조, 장애 특성·체형에 따라 팔걸이나 발받침대의 길이·높이·각도를 모두 개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17년간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다 교통사고로 척수장애자가 된 김씨는 손재주를 살려 2004년 장애인을 돕는 엔지니어로 변신했다.

엔지니어가 제작에 착수하기 앞서 4명의 재활공학사가 장애인 불편 상담과 신체 기능을 파악한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린 동시 ‘장마 비’(엄마가 묵은 빨래를/ 내다 말리 듯/ 하늘이 구름 조각/ 말리고 있네/ 오랜만에 나온 햇빛이/ 너무 반가워)의 작가 서정슬(62·여·뇌성마비 1급)씨도 재활공학사의 도움을 받았다. 주먹으로 펜을 말아 쥐고 시를 쓰는 일마저 어렵게 되자 서씨는 시를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재단에 요청했다. 재활공학사 박종명(29)씨와 신춘식(26)씨는 서씨가 오른손 엄지발가락 하나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 발가락용 스틱 마우스가 있으면 시를 계속 쓸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해 제작을 의뢰했다.

이 재단이 2000년 서울시내에서 최초로 맞춤보조공학 서비스를 시작한 계기는 ‘전원 스위치’였다. 어느 날 밤 재단의 장애인 숙소가 한밤인데도 불이 훤했다. 백진앙(63) 이사장이 “왜 불을 안 끄고 자느냐”고 물었다. 이에 “제가 어떻게 불을 끕니까”라는 충격적인 답이 돌아왔다. 이 장애인은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장애인 가운데는 방 안에 긴 막대기를 갖다 놓고 스위치를 때려 불을 끄는 사람도 있었다. 리모컨으로 작동하는 전등을 만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보조공학센터가 설립된 2006년 7월 이후 4000여 명의 장애인이 도움을 받았다. 3000여 명에게 리모컨 전등 장치가 공급됐다. 수리하거나 개조하는 것 외에 센터가 직접 개발한 제품도 20여 종에 달한다. 하반신이 마비된 고경아(41·여·서울 강서구 등촌동)씨 집 현관에는 무대장치에 쓰는 리프트를 달아주었다. 덕분에 칠순의 고씨 어머니는 몸무게가 자신의 두 배 이상인 딸의 병원 외출을 돕기 위해 안간힘을 써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됐다.

장애인 학생을 소풍에 데려가고 싶어하는 울산의 특수학교 선생님에겐 학생을 업고 갈 수 있도록 맞춤 포대기를 공급했다. 한 손만 쓰는 이를 위한 치약·샴푸 짜개, 겨울에 전동 휠체어를 타는 이들을 위한 하반신용 발열 담요, 손 떨림이 있는 환자를 위한 휠체어용 사진기 고정 장치도 재활공학사와 엔지니어가 합작해 개발한 것들이다. 발가락 마우스나 수직 리프트처럼 센터의 기술력으로 만들 수 없는 장치는 외부 업체에 주문한다.

한벗재단은 지난해 11월 서울시 지정 보조공학센터가 돼 7개월간 5억3000만원을 지원받았다. 장애인 414명이 보조기구 혜택을 받았다.

박태희 기자


서울시 최고 90%까지 보조금 … 다른 지역 장애인엔 실비만 받고 만들어 줘

서울시의 보조공학서비스센터는 두 곳이다. 한벗재단 외에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도 보조공학서비스센터가 있다. 자체 제작실은 한벗재단에만 있다. 두 센터가 보유한 보조기구는 658종 1930점이다. 보조기구가 필요한 장애인은 한벗재단(02-715-6100)이나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02-440-5891~6)에 연락하면 된다.

장애인이 상담을 요청하면 센터는 재활공학사를 장애인 가정으로 보내 신체 기능과 환경을 평가한다. 그리고 자체 회의를 열어 신청인에게 필요한 보조기능을 결정하고 자체 제작할지, 외부에 주문할지를 결정한다. 센터는 보조기구 사용자가 불편이 없다고 할 때까지 기기 성능을 개선해 준다.

서울시에 신청해 지원을 받게 되는 장애인은 제작비의 최고 90%까지 시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기초생활수급자는 무료로 빌려 사용할 수 있다. 서울시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장애인이나, 장애인이 개별적으로 보조도구 제작을 신청하면 센터는 실비만 받고 만들어 준다.

한벗재단 보조공학센터 정영만(31) 팀장은 “장애인이 어떻게 옷을 갈아입는지, 변기에 어떻게 앉는지 등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서 보조공학은 시작된다”며 “십수 년씩 누워 있던 장애인은 물론 그 가족의 생활이 보조공학의 도움으로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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