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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북한탐험]9.삼지연의 젊은 아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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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제 백두산을 떠난다.

그 산 정상을 등 뒤에 두고 나는 정남 (正南) 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에 압록강 상류가 동행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겠는가.

백두산에 관한 한 더 이상의 욕심이 없다.

내 기억의 창고 안에 하나하나 부나비처럼 날아 들어온 그 곳 풍경이나 감회 만으로 그 곳은 나에게 처연히 완결됐다.

동행하는 강물과도 헤어졌다.

삼지연 비행장 건물은 아담했다.

사방이 숲으로 울타리를 삼고 있는데 그 텅 빈 활주로 한 구석엔 우리가 타고 떠날 비행기 한대 뿐이었다.

오래된 친구라도 거기에 버려두고 떠나는 것처럼 떠나자니 여간 안타까운 바 아니었다.

이깔나무와 봇나무 숲은 차라리 바다였다.

어디가 동쪽이든, 어디가 서쪽이든 상관없는 그 바다는 무작정 펼쳐져 나무만으로 세상을 이루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숲은 숲을 낳고, 또 숲은 숲을 낳고 있었다.

그런 곳에 한번 발걸음을 들여놓으면 어디로 빠져나갈 수 없게 지루하고 막막하다.

그러다가 문득 수런수런 청량감과 함께 온몸에 낯선 감촉이 일어난다.

호수가 나타났다.

아주 어마어마한 광경인 그 호수가 곧 삼지연이었다.

방금까지 어린 아이의 투레질 같은 잔물결이 일다가 신통하게도 그 물결이 자고 있는데 그 정적의 수면 위에 백두산 정상 봉우리들의 모임이 그대로 비쳐 있었다.

그 수면에서 고개를 들어올리니 거기에 백두산 정상의 제 모습이 호수 건너 숲 위의 공중에 마치 신령들의 농성처럼 실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삼지연은 백두산의 거울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신과 같은 삼지연이지만 여름 한철이 아니고는 그 곳에 깃들여 살기에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모진 추위도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모든 곳과의 두절된 고적 (孤寂) , 그것을 견딜 수 없다.

오직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들만이 그들의 태생적 (胎生的) 인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기능이나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의 가난과 추위를 이겨내면서도 천연의 순정 뿐인 나날은 그 자체가 삶의 존엄성인지 모른다.

주식 (主食) 은 일정기간 고랭지에서 나는 감자다.

8월 15일이면 저 아래 동해안의 바닷물도 한류를 불러들인다.

하물며 백두산 일대 양강도 고원지대의 그 무렵이면 벌써 서리가 내린다.

화전민 시절이 지나갔다고 하지만 아직도 화전에 가까운 이 일대의 경작으로는 규모가 작은 밭뙈기에 감자를 심어 여름날 감자꽃은 다른 눈부신 꽃들과는 달리 외딴 슬픔의 꽃이 아닐 수 없다.

서리를 맞은 뒤에야 땅속의 감자는 제 맛이 든다.

그것을 캐 땅 속 깊숙이 묻어두고 그것을 끼니 때마다 꺼내어 먹는 것이다.

양강도 감자요리는 무려 82가지나 됐다.

그 82가지 감자요리의 각각 다른 갖은 맛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우리 일행이 맛본 두차례 감자요리 20가지의 식탁에서 이런 많은 요리를 일궈낸 재능은 실상 감자 주식의 오랜 삶의 고행에서 얻어진 것임을 알아야 했다.

감자 한가지 만으로 이렇듯이 많은 종류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데는 그만큼 다른 식품에 대한 다양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자떡은 쌀이나 보리.밀로 만든 떡에 뒤지지 않는 향토적인 미각을 깍듯이 일으켜 준다.

녹마묵은 감자로 만든 것 같지 않았다.

청포묵보다 더 순정적이었다.

또 녹마국수는 냉면이나 메밀국수와도 그 맛이 견주어지고 남는데 국숫발이 질겨 실한 이빨에도 올깃졸깃 단단했다.

또 감자완자는 아이들 간식의 모범적인 맛이 났다.

막갈이국수 역시 한 대접 먹고 나자 뱃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동지 단팥죽인가 착각할 만큼 새알심이 들어 있는 오그랑죽은 감자로 이런 요리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곧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감자요리 가운데 오래 기억될 요리의 하나는 단연 '언감자국수' 였다.

그 국수를 평풍나물.두릅나물.참나물 반찬과 함께 먹는 맛은 나처럼 이른바 식도락과 인연이 없는 사람조차 새삼 식도락의 경지를 터득케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언감자국수는 북한에서는 김일성 (金日成) 주석의 기념식단이기도 하다.

저 30년대 그가 이끄는 항일 빨치산들이 부득이 숲속에 출몰했는데 그때마다 보급이 끊기면 굶주리기 일쑤였다고 북쪽사람들은 말했다.

그럴 때 화전민들이 감자밭의 감자를 캐지 않고 둠으로써 빨치산이 캐 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언감자국수는 보기에는 좀 푸르뎅뎅하지만 그 맛은 원숙했다.

나는 그 곳을 떠나기 전날 감자꽃을 생각했다.

숲속의 저녁은 벌써 꺼무꺼무 어두웠다.

그런 어둠 뿐인 길에다가 진저리치는 한기가 들며 내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 시각에 텅 빈 어둠 저쪽에서 한 사람이 오고 있었다.

여자였다.

일찍 시집간 여자라 아직 스무살 무렵의 앳된 맨 얼굴 그대로였다.

나들이 차림이라고 해야 수수한 평상복 차림이고 굳이 머리나 얼굴을 매만진 것도 아닌 채였다.

감자꽃 같았다.

"어디서 오십니까. " "소백에서 옵니다. " "여기서 소백이 얼마나 됩니까. " "12㎞입니다. 그 곳에 언니가 살고 있습니다. 1시간 반 걸어서 왔습니다. "

삼지연읍에 사는 동생이 3년 동안이나 못본 언니가 보고 싶어 소백에 사는 언니한테 갔다 오는 길이었다.

가다가 날이 저물테니 자고 가라는 것을 마다하고 나서서 날래디 날랜 걸음이었다.

이제 늦은 저녁 식구들과 밥상머리 감자 녹마국수를 차려낼 것인가.

먼 길을 그렇게 마친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 혹은 불행이라는 말이 아무런 장식도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무섭도록 순진 소박한 표정에서 겨레의 근원에 싹터 있는 이름없는 여심 (女心) 을 나는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혜산이나 함흥에 가 보았느냐고 감히 묻지 않았다.

요즘 하루에 몇 끼니나 먹느냐고 묻지 않았다.

또 나는 그녀에게 '부디 잘 사십시오' 따위의 헛된 인사말도 할 수 없었다.

민족 속의 너와 나란 무엇인가.

그녀의 뒷모습은 어둠 속에서 지워졌고 나는 영문 모를 회한 (悔恨) 의 무능에 잠겼다.

그렇게 백두산을 떠나야 했다.

글 = 고은 (시인.경기대 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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