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재계 자율서 정부 손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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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대 그룹 사업구조조정에 결국 정부가 나섰다. 정부가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더이상 재계의 자율에 맡겨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서다.

정부는 산업자원부 차관의 기자간담회 형식을 빌려 재계안 (案) 의 문제점을 사실상 공식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했다.

한마디로 시간을 줬지만 나아진 게 없다는 얘기다.

이헌재 (李憲宰) 금감위원장도 같은 얘기를 했다. "최초 발표와 이번 발표는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철도차량.발전설비 분야는 더 후퇴한 감이 있다" 고 비판했다.

따라서 "시간을 더 줘봤자 마찬가지라 판단하고 이미 나온 기본 골격을 토대로 은행의 워크아웃 (기업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넣어 추진키로 했다" 고 李위원장은 밝혔다.

"그 과정에서 금감위는 부채비율.사업정리 등과 관련된 가이드라인을 줄 것" 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결국 정부가 나서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의 생각은 다르다.

김우중 (金宇中) 전경련 회장은 재계안에 대해 정부가 미흡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과 관련, "대기업이 처음으로 이만큼이나마 합의한 점은 높이 평가해줘야 한다" 고 주장했다.

金회장은 "5대 그룹 사업구조조정은 이제 시작이며 후속 추진과정에서 차츰 내용이 진전될 것" 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특히 불만을 표시한 반도체. 철도차량. 발전설비 문제에 대해서도 ▶반도체의 경우 현대와 LG가 실사결과에 따르겠다고 합의한 것은 큰 진전이며 ▶철도차량은 전량 정부수요에 의존하는 만큼 독점에 따른 폐해를 없애려면 2원화가 낫고 ▶발전설비도 한중과 현대중공업이 머지않아 결론을 내게 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특히 책임경영 주체나 지배주주 선정문제는 이번 안을 실천해나가는 과정에서 당사자들간에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도 정부는 지레 잘 안될 것이라고 의심부터 한다며 불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9월말까지 예정된 대기업 구조조정을 추석연휴 이후까지 미뤄가며 재계 스스로 모양새를 갖춰 새 정부 의지와 국민 기대수준에 걸맞은 구조조정안을 만들어 오기를 기다려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당초 합의내용보다 후퇴하는 경우까지 나오더란 얘기다.

따라서 자율조정이란 모양새를 구기더라도 금감위를 창구로 은행들을 통해 5대 그룹 부실기업에 대한 여신중단.퇴출 등 원론적 방법으로 대응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정부의 방침에는 '엄포' 의 성격도 엿보인다.

여신중단.퇴출이란 극단적 방법까지 들먹임으로써 재계를 압박해 빅딜 (대기업간 사업교환)에 대한 합의를 빨리 끌어내자는 의도를 깔고 있다.

따라서 빅딜을 둘러싼 정부.재계의 줄다리기는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재훈.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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