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상회담 통해본 한일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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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대중 대통령의 이번 방일은 시기적으로 한.일관계가 최악의 갈등기를 맞았던 김영삼 (金泳三) 정권 후반기를 추스르고 '미래동반관계' 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YS집권 초반기에 우호적으로 풀려가던 양국관계가 험해진 것은 95년 이후 일본 극우정치인의 망언이 돌출하면서부터. 당시 "식민지시대에 일본이 좋은 일도 했다" (에토 다카미 총무청장관) , "군대위안부는 업자의 상행위에 참가한 것. 강제성이 없었다" (오쿠노 세이스케 전법무상) , "당시 공창 (公娼) 제도가 엄연히 존재했다" (가지야마 세이로관방장관) 는 망언이 쏟아졌다.

더욱이 집권 자민당 차원의 '독도 영유권' 에 대한 시비가 이어지자 YS는 96년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 는 돌출발언으로 한.일관계를 급속도로 경색시켰다.

이는 일본측의 한국어선 나포, 한.일어업협정 파기로 이어지며 올4월 김대중 대통령.하시모토 총리의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전까지 사실상 '無외교' 상황이 이어져왔다.

노태우 (盧泰愚) 대통령 때는 군대위안부 문제의 돌출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전까지 군대위안부 문제에의 정부 간여를 인정치 않던 일본이 92년 개입을 시인한 때문. 92년 미야자와 기이치 (宮澤喜一) 총리 방한 때는 위안부피해자단체의 시위로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우리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일본을 공식방문한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은 "일본의 방위비용을 사실상 한국이 분담하고 있다" 는 명분으로 40억달러 (당초 1백억달러 요구) 의 금융지원을 받아내기도 했으나 '정당성 부재'가 한계였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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