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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건 생명 자각, 유영모를 통해 깨달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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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호 14면

오가와 교수는 30대까지는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당시에는 인간보다 제도가 중요하다고 봤다. 20여 년 전부터는 지구 생태계 위기 극복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최정동 기자

전 도쿄대 교수인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68) 닛쇼가쿠샤(二松學舍)대 교수는 유영모 철학에 심취해 있다. 일본 근현대 사상의 권위자인 그는 홍대용 연구 등 한국 실학 연구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도쿄 시민강좌에서 1년 동안 유영모 사상을 강의할 예정이다.

한국 사상에 심취한 오가와 하루히사 전 도쿄대 교수

오가와 교수를 사로잡은 다석 유영모(1890~1981)는 기독교 사상가다. 유영모는 ‘조선 3대 천재’로 손꼽혔다. 중학교 2년 정도의 정규 학력으로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2년간 교사 생활을 했고 교장을 역임했다.

유영모의 사상은 기독교에서 출발해 유교ㆍ불교ㆍ도교 등 전통사상을 만나며 전개됐다. 그에게서 싹튼 씨알사상을 제자인 함석헌(1901~89)이 꽃피웠다. 유영모는 하나님을 만나고 민족을 구성하는 주체로서 ‘씨알’이란 개념을 제시했고 함석헌은 1970년 사상잡지 ‘씨알의 소리’ 창간호에서 씨알을 민중으로 규정했다. 씨알 사상은 생태환경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사상으로도 평가받는다. 2007년 창립된 재단법인 씨알(이사장 김원호)은 유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씨알 사상은 세계에도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깊이 있는 사상이다. 우선 오가와 교수를 비롯해 일본 철학계가 씨알사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재단법인 씨알과 교토 포럼이 씨알사상을 주제로 ‘제1회 한·일 철학포럼’을 지난달 19~23일 목포대에서 개최했다. 한국 철학의 ‘수출’을 후원하기 위해 전라남도(박준영 도지사)가 포럼 예산을 지원했고 목포대가 숙소와 회의장을 제공했다.

포럼 진행을 위해 수고한 50, 60을 넘긴 자원봉사자들은 학창 시절 유영모·함석헌을 존경하던 이들이다. 68세인 오가와 교수도 올해 유영모를 만났다. 그는 “유영모 사상의 뛰어난 점은 사고의 고결함과 검소한 생활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실천했다는 것”이라며 “사랑과 덕이 있는 인간이 되려고 하는 유영모·안창호·이승훈의 사상을 결합해 일체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영모를 일본에 알리기 위해 유영모에 대한 해설서와 번역서를 최대한 빨리 일본어로 출간할 계획이다. 다음은 지난달 24일 인터뷰 요지.

-유영모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1월 초 일본 교토철학포럼의 대표인 김태창 선생을 통해 유영모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 서가에 박영호가 지은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이 있었다. 서둘러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의 매력에도 빠져들게 됐다. 이광수가 지은 『도산 안창호』, 민기석이 지은 『남강 이승훈』도 꼼꼼하게 읽었다. 2009년은 내 68년 인생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해다. 유영모·안창호·이승훈을 동시에 알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유영모를 통해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됐다. 생각하는 것은 생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유영모 사상에 따르면 생각한다는 것은 ‘영성적 마음으로 사고’하는 것이며 자신의 온몸을 연소시켜 고결한 생각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유영모에게 고결은 육체적 생명과 바꿀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다.
또 한 가지의 조건도 중요하다. 물질과 신체를 바지런하게 사랑하고 아끼어 잘 연소시킨다는 조건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체를 충분하게 활용하면서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욕망을 통제하는 고결함과 검소함의 추구는 지구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서도 중요한 가치다.”

-유영모는 무엇을 추구한 사상가인가.
“사상가·종교가로서 그의 과제는 ‘육체적인 나’를 버리고 ‘영적인 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육체적 나’로는 금수의 본성을 극복할 수 없다. ‘영적인 나’로 이행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게 그의 확신이자 과제였다. 유영모는 신의 위대함을 인간이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육체적 나’의 상태에서는 신의 위대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봤다. 영적인 나를 지향하는 일은 유물론자인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유영모가 실천하고 도달한 ‘영적 나’의 내용에 대해서는 강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유영모가 지녔던 신앙의 특성을 요약하자면.
“그는 기독교·유교·노장사상·불교가 모두 추구하는 게 같다고 이해했다. 톨스토이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불합리한’ 요소인 처녀임신·부활·기적을 모두 부정했다. 즉 톨스토이가 시도한 신약성서의 합리화에 유영모도 동의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영모의 기독교는 영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것이 된다. 기독교에서 불합리적 요소를 제거해도 영성적 마음, 즉 ‘하나님을 믿는 마음’ ‘위로 올라가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유영모 사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이라는 표현을 윤리적·도덕적·가치적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으면, 나처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받아들이기 쉽게 된다. 내가 유영모 사상에 친근감을 느끼는 이유다.”

-그가 그리스도교의 불합리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려고 한 배경은 무엇일까.
“유영모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구비한 사상가였다. 그는 숫자를 좋아했으며 오산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또한 아들과 함께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 관측을 즐겼다고도 한다. 별에서 영원성을 발견하고 우주의 광대함·무한함에서 신을 발견한 그의 신관은 매우 합리적이다. 유영모는 자연에 접하여 자연계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모두 이해하려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신의 위대함을 느끼고 그 감응 속에서 영성을 확인했다고 생각된다. ‘자연의 위대함=신의 위대함’이라는 등식을 배경으로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는 데에는 육체적 한계는 방해꾼이 된다.”

-유영모 연구를 어떻게 진행시킬 계획인가.
“유영모와 안창호·이승훈을 연결할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유영모보다도 안창호와 이승훈에게 훨씬 많은 친근함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덕·체·지(德·體·智)를 갖춘 인간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고 하는 교육입국(敎育立國) 사상을 실천했다. 나는 그들이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통해 최고의 확실한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이 두 사람은 크리스천이었지만 그들의 사상은 종교성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있다고 한다면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다. ‘사랑이 부족’하다는 게 두 사람의 입버릇이었는데 이는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이 두 사람과 비교한다면 유영모는 종교가였다. ‘육체적인 나’를 죽이고 ‘영적인 나’를 구한다는 것을 한결같이 주장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적인 나’에 도달해야만 영원히 산다는 그의 주장에서처럼 영(靈)과 영생에 구애될 때 유영모의 사상은 신을 믿는 자만의 사상이 된다. 적어도 무신론자·유물론자는 접근하기 어려운 세계가 된다.”

-그렇다면 유영모를 배제하고 안창호와 이승훈만으로 대안적 사상체제를 수립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자유·평등·민주주의·인권의 사상에서 인류는 사상 최고의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런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타락으로 치닫고 있다. 과거 사람들과 비교하면 현대인은 모든 면에서 질적으로 떨어진다. 현대 인간의 과제는 지구의 생태계를 지키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욕망이 지나치게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유영모의 두 가지 요구, 즉 사고의 고결함과 검소한 생활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유영모의 삶의 방식을 보통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는 게 대부분의 견해일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가 있다. ‘응석부리지 말라!’ ‘그런 생각으로는 지구의 생태계를 지킬 수 없다!’ 그 무엇보다도 그런 어리광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기준으로 하여 인간을 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 학술 계획은.
“먼저 안창호·이승훈이 강조했던 ‘사람 만들기’를 전면에 끌어내고 널리 호소해야 한다. 그 중심에 유영모의 자리를 잡자. 세 사람의 공통점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이 있고 덕(德)이 있는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이 이들 사상의 공통 분모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중심으로 신변을 청결하고 깨끗하게 해나가는 실천을 행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유영모의 공헌은 모든 종교·철학·사상·문화 속에서 고결한 생각을 보려고 한 점에 있다. 나는 이 세 사람을 우선 일본 국내로부터 나아가 동아시아 삼국에 소개하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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