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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갑골문·신화·오페라 … 당신이 궁금한 모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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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생각의 역사1 - 불에서 프로이트까지
피터 왓슨 지음, 남경태 옮김, 들녘
1240쪽, 4만5000원

모자를 벗자. 무시무시한 책 앞에 경의를 표하는 게 순서다. 일단 두껍고 무겁다. 보통 책 서너 배 두께인 책을 체중기에 올려놓으니 1.5kg! 옛날 기계식 카메라의 두 배다. 덜컥 겁이 나지만 책표지 카피가 눈을 찌르고 들어온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퇴로를 차단당했으니 정면도전밖에 길이 없는데, 이 책은 갑골문·화약·나침반에서 길가메시신화·오페라·연금술에 이르는 ‘지성사 + 과학사 + 예술사’의 대하장강이다.

둘 중의 하나다. 멋진 통섭·회통(會通)을 이뤘거나, 잡동사니 정보 짜깁기이거나…. 저자의 근사한 설명에 따르면 자기 책은 “왕과 황제, 장군들이 빠진 역사이자, 군사원정과 정복이 누락된 희한한 역사책”이다.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사가인 그는 혹시 단순한 지적 호사가일까? 그건 아니다. 서문에서 영국의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 『총, 균, 쇠』의 제러드 다이아몬드와 같은 반열에서 책을 썼음을 당당히 자부한다.

일테면 애덤 스미스는 임금·자본이야말로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힘이라고 보았다. 다이아몬드의 질문은 또 달랐다. “현대 이전 인류는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왜 아메리카를 발견한 유럽이 아시아를 앞섰는가?” 진보의 힘을 믿었던 17세기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와 달리 인쇄술·화약·지식이야말로 역사의 성장엔진이라고 단정했다. 이런 오랜 의문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이 책의 호기심은 실로 유장하다.

“시간을 기원전과 기원후로 구분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플러스(+) 마이너스(-) 기호는 언제 도입됐나?” “인류 진보의 효소인 낙원·내세(來世)라는 관념은 어디서 비롯됐나?” 인류에 영향을 미친 생각과 발명의 히스토리를 전면 새롭게 쓰자는 것인데, 과연 ‘어떻게’가 숙제다. ‘플라톤 죽이기’가 우선이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에서 보듯 그는 정신이 물질보다 우월하다고 봤기 때문에 자아·지식·존재 등의 주위를 돌다가 날 샌다.

왓슨이 볼 때 인간정신은 구름 타고 노는 신선의 게임이 아니라 나침반·화약 등 구체적인 발명품에 따라 새로운 춤을 춘다. 기후변화나 환경재앙, 신종 질병도 큰 변수다.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창문은 수도원보다 동물원”이라는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 본 인류사는 영혼·유럽·실험이라는 3박자 리듬을 타고 전개돼왔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인류가 만든 돌도끼, 구석기 3만 년 전에 만개한 예술, 뒤이은 농업혁명을 조망하며 롤러코스터를 탄다.

고대 그리스를 “전무후무한 생각의 배양기”라고 평가한 뒤 책의 몸통은 근대 초입 ‘유럽의 질주’로 채워진다. 이슬람·인도·중국으로 시공을 넘나들다가도 다시 유럽을 찬양한다. 그의 신앙인 서구중심주의가 맞기는 맞는 소리일까? 저자도 선선히 인정하듯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도 알고 보면 왕도깨비였다.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지만 점성술·연금술·장미십자회에 매료됐던 얼치기 신비주의자이자, 아마추어 신학자이기도 했다.

저자는 “뉴턴이 연금술을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변화시킨 과학적 발견도 못 했을 것”이라면서 슬쩍 빠져 나가지만 유럽이 인류 진보의 1번지라는 신념은 낡았다. 조지프 니덤의 고전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보듯 그건 ‘서구만의 자뻑’이다. 스티븐 샤핀의 『과학혁명』도 그쪽을 지적한다.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1943년 프랑스 역사학자 코이레부터인데, 이후 ‘부자 족보 만들기’처럼 뉴턴·갈릴레오를 짜맞춘 결과가 과학혁명일 뿐이다.

책은 어쨌거나 매력적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흠은 아니다.

평이하면서도 핵심을 비껴가지 않고 있고, 아놀드 하우저의 고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전3권)보다 시야가 넓다. 아마추어 역사가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이야기』보다는 훨씬 진지하다. 복더위, ‘모든 것의 역사’라는 바다에 빠져봐? 무게만큼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책, 시간을 투자할만하다는 데 기꺼이 한 표를 던진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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