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짜 ‘승정원일기’에는 장위영·총어영·통위영·경리청이 포수를 풀어 호랑이를 잡겠다며 다투어 올린 보고들이 그득하다. “조선 사람들은 일 년의 절반은 호랑이를 쫓느라 보내고 나머지 반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힌 사람을 문상하느라 보낸다는 중국 속담은 거짓이 아니다.” 이듬해 조선팔도를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목격담마냥 호환은 그 시절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들이닥칠 수 있는 일상사였다.
공포의 화신 호랑이에게도 천적은 있었다. 중국에서 높은 값으로 거래되는 뼈와 가죽을 노린 호랑이 사냥꾼들이다. 비숍이 만나 본 그들의 무기 화승총은 초라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면 천천히 타 들어 가는 불심지 노끈이 달렸고 탄창에는 둥근 콩알 크기의 총알 세 개가 들어간다. 한순간이라도 미적거리면 사냥꾼은 곧 아무 생각도 없게 된다.” 1900년께 서울 근교 산자락에서 짚신 신고 장죽 물고 화승총을 어깨에 멘 채 당당히 버텨 선 세 사람(사진)은 제법 명성을 떨친 명포수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뒤 이들은 더 이상 총을 들 수 없었다. “일인이 병기를 금하여 어느 사람이든지 감히 총을 사용치 못한다. 이제는 산중 영웅이 서울 남대문까지 종종 심방하며, 짐승을 만나는 사람은 죽지 않으면 물려갈 뿐이라.” 1914년 5월 6일자 ‘국민보’는 무력저항을 우려한 일제가 민간의 무기 소지를 금함으로써 호환이 서울 도심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 상황을 전한다.
그때 담대했던 호랑이 사냥꾼들은 신식 연발총을 든 일본인과 서구인 엽사들의 몰이꾼으로 전락했다.
1917년 11월 14일자 ‘매일신보’는 일본인 정호군(征虎軍) 100여 명의 입국을 보도했다. 한 달여 동안 이들은 2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 1930년대 이후 이 땅에서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궁중과 산중의 제왕을 모두 제압한 일제는 요순우탕(堯舜禹湯)에 이어 맹수를 몰아내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해준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아니었다. 그때 일제는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을 위협한 또 다른 모습의 포식자였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