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마녀사냥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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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02면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 전 글로벌 금융위기의 책임이 세계적 금융기관과 기업의 경영진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이 “윤리를 망각한 채 탐욕스럽고 무책임하게 경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미국 정부의 책임도 그 못지않다고 본다. 경영진의 탐욕을 부추기거나 압력을 넣은 건 정부였다. 1가구 1주택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을 달성하려고 저소득층에도 대출해 주도록 금융기관을 닦달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정부 책임을 빼고 말했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그래서 그런 걸까. 국내 금융 당국도 책임을 민간에 지우려 하고 있다. 그것도 한 개인에게. 우리은행장을 지냈던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그다. 우리은행이 큰 손실을 본 게 그의 탐욕 때문이었다는 투다. 그가 우리은행장일 때 부채담보부증권(CDO) 등에 거액을 투자해 대부분을 날렸다고 한다. 또 우리은행이 외형 경쟁을 주도함으로써 은행권 전체를 큰 위험에 빠뜨렸다고도 한다. 예금보험공사가 먼저 조사를 끝냈고 감독 당국인 금융감독원도 검사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책임을 묻는 건 확실하고, 징계 수위 결정만 남았다는 보도도 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미리 밝혀둔다. 나는 황 회장과 일면식조차 없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오직 하나, 금융 당국의 행태가 정말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시계추를 지난해로 되돌려보자. 당시 한국 경제는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달러 수급 구조가 완전히 무너져 제2의 외환위기 우려가 팽배했다. 신용경색도 심각해 모두들 줄도산이 날까 봐 가슴 졸였다. 위기는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충격은 우리가 더 받았다. 이렇게 된 데는 은행 탓이 컸다. 예대율이 무려 130%나 됐다. 앞다퉈 대출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예금보다 대출이 30%나 더 많았다. 은행이 망한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속출했다. 은행이 건전성만 제대로 챙겼더라도 위기 충격은 한결 덜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위기에 은행 책임은 아주 크다. 문제는 황 회장 혼자서만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은행권 전체가 공동 책임을 져야 하는데도 다른 은행장들은 쏙 빠졌고, 그래서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 정말 옳지 않은 건 감독 당국이다. 은행 사정이 그렇게 나빠지기까지 감독 당국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가. 위기가 터지기 한참 전인 2005~2006년부터 예대율 급증은 숱하게 지적됐다. 그때 감독 당국이 경고만 제대로 했더라도 상황이 그렇게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펀드 판매만 해도 그렇다. 투자자에게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팔아도 당국은 나 몰라라 했다. 인사이트 펀드가 특정국가에 ‘몰빵’(한 곳에 몰아 투자함)했다는 게 드러났을 때도 수수방관했다. 그런데도 자기 책임은 묻지 않고 남의 잘못만 추궁하고 있으니 옳지 않다는 게다. 남의 눈 티끌 보기 전에 내 눈 들보부터 보는 게 일의 순서 아닌가.

CDO 문제도 그렇다. 우리은행이 산 건 그가 행장일 때였지만 그때는 손실이 나지 않았다. 행장에서 물러난 것도 2007년 3월, 위기 발발 한참 전이었다. 후임 행장이 얼마든지 팔 기회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황 회장의 책임을 더 엄중하게 묻겠다는 건 잘못됐다. 게다가 예보는 그 무렵 뭘 하고 있었나. 그때도 예보는 주기적으로 우리은행에서 보고를 받았고 경영을 들여다봤다. 당시엔 가만 있다가 손실이 나자 책임을 묻겠다고 나서는 건 옳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황 회장 책임이 없다는 건 아니다. 단지 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게 잘못됐다는 게다. 11년 전 외환위기 때도 그랬다.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 이 두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때 후배 공무원들은 마녀사냥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그걸 기억하는 감독 당국이라면 이럴 순 없다. 정부부터 먼저 책임져야 한다. 그런 후 다른 은행장들과 같이 황 회장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하지만 당시 감독 당국의 수장이 지금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있으니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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