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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경성과 오늘 서울 구보씨와 거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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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06면

소설 속 구보는 소설 밖 박태원과 마찬가지로 도쿄(東京) 유학생 출신이지만 사실상 백수나 다름없다. 낮 11시~12시쯤에야 일어나 어머니의 말없는 잔소리를 느끼며 집을 나선다. 구보의 발자취를 되짚는 출발점은 그 집이 자리했던 청계천 광통교 부근이다. 작가 박태원의 생가이자 그 아버지가 하던 약국도 여기에 있었다. 1950년대 복개됐던 청계천은 2005년 복원돼 예전처럼 물이 흐른다. 다만 복원된 광통교는 본래보다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 예전 광통교의 위치에는 현재 남대문로에서 종로 네거리로 이어지는 광교가 놓여있다.

75년 세월이 바꾼 도시의 초상

집을 나섰다고 딱히 갈 데는 없다. 구보는 광통교를 건너 발길 가는 대로 가까운 종로 네거리 화신상회 앞에서 일단 멈춘다. 화신상회는 조선인 자본으로 세워진 서울의 대표적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이란 당시의 새로운 도시문물이었다. 구보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잠시 발길을 들였다가, 젊은 부부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모습을 목격한다. 아마도 식당에 올라가 밥을 먹으려는 듯싶다. 엘리베이터 역시 당시 신문물이었다. 중산층 가족의 백화점 나들이 모습 자체는 오히려 지금과 비슷한 것이 눈에 띈다. 구보는 그 모습에 묘한 거리감을 느낀다. ‘흘낏 구보를 본 그들 내외의 눈에는 자기네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는지도 모른다. 구보는 그들을 업신여겨 볼까 하다가, 문득 생각을 고쳐, 그들을 축복하여 주려 하였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에서. 이하 같음) 화신백화점으로도 불렸던 이곳은 1980년대에 헐렸다. 현재 종로타워가 들어선 자리다.

전차를 타고 동대문으로
백화점에 이어 구보가 선택한 도시문물은 전차다. 갈 곳도 없는 구보는 왜 전차에 올라 탔을까. 최혜실 교수는 “근대 도시가 제공하는 볼거리를 구경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전차에 몸을 맡기면 “진열장처럼 펼쳐지는 도시 풍경을 자유로이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구보는 서울에 구경 온 사람이 아니라 서울에 사는 사람이다. 전차 바깥을 일일이 묘사하는 대신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로이 풀어간다. 예컨대 전차가 종묘 앞을 지날 때 차장이 표를 끊으라고 하자,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에 새겨진 연도를 보고 뭔가 의미가 없을까 생각하는 식이다. 구보가 탄 동대문행 전차가 지나게 될 경성운동장도 그런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 전차 안에는 뉴스를 게시하곤 했다. 구보는 자신이 탄 전차에는 경기 뉴스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일제가 1926년 세운 경성운동장은 최근까지 동대문운동장으로 불리다 지난해 완전히 철거됐다. 현재 디자인플라자파크를 짓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전차 안에서 구보는 어디를 가볼까 궁리해 본다. 장충단·청량리·성북동 등 교외? 창경원(창경궁)이나 정신병을 연구하는 친구가 있는 대학병원(서울대병원)? 서울에는 1899년부터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이미 여러 개의 노선이 운행 중이었다. 구보의 궁리는 이를 새삼 확인시켜 준다. 구보가 탄 채로 전차는 ‘한강교’로 방향판을 갈고 훈련원을 지난다. 조선시대 병사들의 훈련장이었던 훈련원터는 현재 을지로 5가에 공원으로 남아있다. 종로를 따라 동쪽으로 향한 전차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서는 을지로를 지나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덕수궁 대한문을 보다
이렇게 전차를 타고 시간을 보낸 구보는 조선은행, 즉 지금의 한국은행 앞에서 내려 장곡천정(長谷川町)의 다방을 향한다. 소설에는 직접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연구자들은 이 다방을 ‘낙랑파라’로 짐작한다. 박태원의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려니와, 당시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 지금으로 치면 소공동길 프라자호텔 근처로 추정된다. 시간은 이제 오후 2시. 구보는 혹 아는 얼굴을 만나지 않을까 기대를 하지만, 아는 체하기 불편한 얼굴이 들어서자 다방을 나선다.

경성부청, 즉 지금의 서울시청 방향으로 나온 구보는 덕수궁 대한문에 눈길을 준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바뀌었듯, 덕수궁도 일제강점과 함께 적잖은 수난을 겪었다. 1920년대 초 일부 건물이 헐렸고, 1933년부터 어린이유원지를 겸한 공원으로 일반에 개방됐다. 전체 규모 역시 과거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시절보다 축소됐다. 그런 덕수궁의 대한문을 보면서 구보는 ‘아동유원지 유동의자(의자처럼 생긴 그네)에라도 앉아 볼까’ 하다가 마음을 바꾼다. ‘그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옛 궁전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지금의 대한문은 구보가 보던 것과는 위치가 다르다. 1960년대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원래보다 안쪽으로 옮겨놓았다.

남대문을 지나 경성역에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구보는 남대문으로 발길을 옮긴다. 구보는 이쯤에서 ‘모데르놀로지(modernology)’라는 낯선 용어를 언급한다. 고현학(考現學)이라고도 한다. 고고학(考古學·archaeology)과 비교하면 그 뜻을 알기 쉽다. 옛것이 아니라 현대의 세태와 일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구보를 창조한 소설가 박태원은 이를 자신의 창작방법론으로 소개하곤 했다. 박태원처럼, 구보 역시 의도적으로 당대 도시풍경을 관찰하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얘기다.

구보는 남대문을 통과해 보지만 ‘불어 드는 바람도 없이 양옆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서너 명의 지게꾼들의 맥없는 모습’을 보았을 따름이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남대문 주변도 지난해 화재로 불탄 이후 맥없는 상태다. 대신 구보는 눈앞의 경성역을 주목한다. ‘사람들이 있는 곳,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이자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기차역)와 친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경성역 대합실에서 구보는 고독감을 느낀다. 빽빽하게 모여든 이들은 저마다 바빴다. 게다가 구보는 반갑지 않은 옛 친구와 마주친다. 요즘 말로 하면 완전 졸부 스타일인 친구다. 그 옆에 미모의 여성이 있는 것도, 그 친구가 교양 없어 보이는 음료 ‘칼피스’를 주문하는 것도 구보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월미도로 놀러 가는 듯싶은’ 이들과 헤어지고 구보는 졸부와 돈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어딘가 피서지로 떠나는 이들이 지금의 서울역에도 붐빈다. 이 서울역은 2004년 고속철도의 개통에 맞춰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구보가 들어섰던 경성역, 즉 일제가 1925년 세운 옛 서울역 건물은 현재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방에서 친구를 만나다
고독한 구보는 친구가 보고 싶다. 경성역에서 나와 조선은행 부근, 아까의 그 다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걸어 시인이자 신문기자인 친구를 불러낸다. 구보는 시 대신 매일 살인강도·방화범 등 기사를 쓰는 친구를 딱하게 여긴다. 친구는 문학 얘기에 열을 올리는데, 구보는 그다지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친구의 문학 얘기에 『율리시즈』가 언급되는 점이다. 아일랜드 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이 장편소설 역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처럼 주인공들이 하루 동안 겪는 일이 펼쳐지는 형식이다. 박태원이 『율리시즈』에서 영향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새 시간은 황혼녘이다. 친구는 전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 구보는 스스로의 표현으로 ‘생활’이 없다. 집에 서둘러 돌아갈 이유가 없다. 혼자 종로 네거리로 향한 구보는 다료, 즉 또 다른 다방에 들른다. 주인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 친구는 박태원과 절친했던 시인 이상으로 보인다. 이 무렵 이상은 종로에 ‘제비’라는 다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박태원의 이 소설, 즉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려준 것도 이상이었다.

두 사람은 ‘대창옥’이라는 음식점에서 설렁탕을 먹는데, 이 와중에 구보는 도쿄 유학 시절에 만난 한 여인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다. 친구는 뒤늦게 급한 일이 생각난 듯 밤 10시나 10시 반쯤 다방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구보의 곁을 떠난다. 구보는 혼자 황토마루, 즉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로 향한다. 아까부터 떠올리기 시작했던 그 여인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때도 광화문은 제자리에 없었다
소설에 따르면 구보는 ‘광화문통 그 멋없이 넓고 쓸쓸한 길을 아무렇게나 걸어’간다. 광화문통은 경복궁 앞길, 조선시대 관아가 즐비했던 육조거리를 일제시대에 이르던 말이다. 구보에게는 이 길이 왜 쓸쓸했을까. 소설 바깥에서 단서를 찾자면, 당시 광화문통에는 광화문이 없었다. 일제는 1927년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헐어버리려고 하다 여론의 반발로 경복궁 동쪽에 옮겨놓았다. 6·25 때 폭격으로 훼손됐던 광화문은 1968년 경복궁의 정문 자리에 다시 세워졌으되, 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였다. 그 광화문은 2006년 철거가 시작됐고, 현재 가림막 안쪽에서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구보씨의 하루에서 그랬듯, 지금도 광화문에는 광화문이 없다.

그 사이 약속시간이 가까워졌다. 친구와 만난 구보는 조선호텔 앞을 지나, 경성우편국 건물을 바라보면서 황금정, 즉 을지로로 향한다. 종로에 다다른 이들은 종각 뒤 술집을 찾는데, 자주 보던 여종업원이 낙원정의 카페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향한다. 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마지막 회는 카페를 나온 이들이 새벽 2시쯤 종로 네거리에서 집으로 향하는 것으로 끝난다.

카페나 다방은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어도, 구보가 하루 동안 걸었던 발자취는 지금도 서울에 남아 1930년대와 21세기를 연결해 준다. 최혜실 교수는 “구보는 흡사 ‘불룸스 데이’(소설 『율리시즈』의 주인공 레오폴드 불룸의 이름을 따 그 하루 동안의 여정을 되밟는 아일랜드의 문학행사)처럼 서울을 다시 볼 수 있는 여정을 남겼다”고 말했다.



참고서적=조이담 저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사진제공=도서출판 바람구두·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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